마음시계
마음시계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10.2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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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인생시계가 있다. 우리의 인생을 하루의 24시간의 시계로 표현한다. 거기에 내 나이를 입력시켜 본다. 중년도 깊숙이 발을 디딘 지금, 몇 시일까.

“당신의 인생 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순간 “쿵” 가슴이 내려앉는다. 시간으로 확인하니 실감이 난다. 오후 4시 30분. 이 시간은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이른 출근을 한 사람들은 슬슬 퇴근을 준비하는 시간. 퇴근 후에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시간. 하루가 저뭇해져 어둠이 찾아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나에게 이 시간은 업무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볼일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끊겨 번잡함이 가라앉는다. 계산기를 두들겨 시재를 맞추고 오늘 한 일감을 정리한다. 그러면 금세 6시 퇴근할 때가 돌아온다. 이제부터는 어두울 일만 남았다. 집에 돌아가 집안일을 하다 보면 깊은 밤이 되는 건 잠깐이다. 이렇듯 잽싸게 줄행랑을 놓는 인생시계가 금방이라도 밤을 몰고 올 것 같아 초조해진다.

인생시계는 지치지도 않고 달리건만 나를 이끄는 마음시계는 고장이 났나 보다. 오월의 어느 날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리 마음을 위로해보아도, 다독여보아도 허사다. 괜찮다고 내내 세뇌를 시켜 보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람이 준 상처가 곪은 자리에서 초침이 부르르 떨고 있다. 태엽이 풀린 모양이다.

마음시계는 나를 자꾸만 칠흑의 밤으로 이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더는 내가 못살겠노라 몸이 말하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체기에 엄한 약만 먹는 날이 늘어난다. 마음이 힘들다 외치는 증거다.

우연히 구찌의 지난 화보를 보았다. 콘셉트로 하는 기묘한 그림이 눈길을 붙잡는다.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인 버지니아 모리의 작품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먹빛으로 풀어내고 있다. 정확히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이 기이하다. 팔다리가 돋아난 의자, 멍한 얼굴이 다닥다닥 박힌 망토, 수수께끼 같은 기괴한 그림을 쫓다 보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연의 바다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빨간 망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여러 개의 얼굴이 멍 때리는 모습이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다른 많은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 보인다. 어쩌면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데서 온 상처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알아주면 그만인데, 여전히 나는 나인데.

어느덧 만난 심연의 바다. `마음아,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일방적인 공격을 당했다고 해서, 당당히 맞서지 못한 자책을 이제 그만 놓아버려'그래, 소모적인 감정에 시간을 허비함은 시든 꽃에 물을 주듯 안쓰러운 일이다. 고함인 듯, 환성(喚醒)인 듯 들리는 소리가 음파로 번져 꼼짝 않던 초침을 건드린다.

우체국의 라일락이 꽃을 피웠듯이 재재소소 가을에 봄꽃소식이 들려온다. 나무는 느껴진 봄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다. 날씨가 정직한 생체시계를 돌려놓은 게다. 마음시계는 예민하여 생체시계를 지배한다. 이렇듯 사람들의 나이를 역으로 흐르게 하여 남들보다 더 젊어 보이게 하는 마력을 가진다.

오후 6시. 퇴근시간이며 또 인생 시계로는 퇴직할 나이다. 집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하고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계획하여야 하는 시기다. 이쯤, 남이 준 독(毒)을 가둬두지 말고 과거를 흘려보내야 하리라. 혹시 아는가. 마음의 마법이 나를 회춘으로 초대할지.

사유만이 닿을 수 있는 내면의 소리. 언제 또 병이 도질지 모르니 마음시계에 쫑긋이 귀재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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