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10.1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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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가을이 깊어가는 뜰 안에 꽃이 만발이다. 자줏빛 분꽃이 백일홍과 어울려 군집을 이루고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황국이 그 향을 천리까지 내보낼 기세다. 담벼락 아래로 한줄기 덩굴이 서로를 휘감으며 울타리를 이룬 인동초와 눈부시도록 진한 금잔화는 언제 보아도 그 화려함이 장관이다.

꽃과 함께 어우렁더우렁 함께 자라는 한쪽 텃밭의 무는 초록 잎을 앞세워 마당의 생기를 더해준다. 다음달 김장철이 돌아오면 속 재료로 쓸 요량으로 심어놓았단다. 지난 5월 장터에 나가 사다 심었다는 생강도 어느새 그 푸른 줄기를 뻗어 대나무처럼 솟아올랐다. 그 모양이 신기해 손으로 이리저리 쓸었더니 잎에서 상큼한 생강 향이 묻어난다.

오며 가며 눈인사로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빨간 벽돌집에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의 주인이었다. 가을도 깊어가는데 그냥 보내기 서운하다며 본인의 마당에서 고기나 구워 먹자고 제안을 했다. 우리 부부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그 어느 해보다도 낯선 추석 명절을 보내고 조금은 아쉽기도 한 찰나에 참으로 감사한 초대였다.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과 한 상자를 들고 방문했다. 대문 밖에서 바라다보던 풍경과는 달리 마당이 꽤 넓었다. 오늘 초대받은 집은 장손 집안으로 해마다 명절이면 일가친척들로 붐볐단다. 그러나 올 명절에는 간소하게 가족들끼리만 차례를 지냈다는 말과 더불어 코로나 여파로 귀성이나 성묘 자제를 요청받는 시절이니 추석 연휴 내내 북적북적하던 마당에 깃든 적막감이 낯설었단다.

예년과 사뭇 다른 명절 연휴를 보내고 못내 아쉬운 찰나 이웃의 초대는 더없이 반가웠다. 더구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는 넓은 마당을 가진 그 집 마당이 부러워 오가며 곁눈질로 몇 번을 봤었다. 소원성취라도 한 듯 초록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온통 꽃과 채소로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 안 가꾸기를 좋아하는 안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마당은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그 운치가 남달랐으리라.

너른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다. 안주인이 평상에 갖가지 채소와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상을 차린다. 불기운이 한껏 달아오르고 고기 굽는 냄새와 청국장 끓는 소리가 마당을 휘감는다. 뉘엿뉘엿 붉은 노을마저 서산을 넘어서더니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별을 품으며 하늘을 덮었다.

마당 평상에 앉아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고 차도 마셨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무거웠던 명절 끝의 아쉬움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면회가 금지되어 요양원에 계시는 부모님을 먼발치에서 뵙고 돌아서던 때 폭풍처럼 밀려오는 죄의식에 어깨가 무거웠다. 명절날 차례상을 차리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에 힘들어도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깃털처럼 가벼웠던 마음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뜰 안에서 소박한 음식으로 서로에게 내면을 털어내며 이웃을 사촌으로 만들어 낸 10월의 어느 멋진 밤이었다. 코로나로 생경했던 올해의 명절. 나는 좋은 이웃을 만나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귀한 가을 상추를 한 아름 선물 받아 싸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모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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