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앞에서
후회 앞에서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10.0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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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비가 오락가락한다. 운동을 나서려다 주저앉는다. 조금 지나자 구름 사이로 해가 반짝 비춘다. 이때다 싶어 머무적거리지 않고 밖으로 나온다. 산산한 바람과 햇살이 내리쬐는 들녘은 하루하루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가벼운 발걸음에 흥이 실린다.

반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실비로 변한다. 우산을 쓰고 더 걷다 보니 굵어지는 빗줄기. 더 할까,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까 잠깐 망설였다. 예서 멈추었어야 하건만 마음먹은 시간이 덜 찼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린다. 비는 금방 더 거세져 작달비로 쏟아진다. 우산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억지로 비에 맞서는 동안 운동화는 물이 흥건하고 옷이 다 젖었다.

웃비는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만들고서야 그쳤다. 내게 심술을 부려놓고 다시 화창한 날씨다. 여우 같은 날씨에 오기가 생긴다. 이 모양새를 하고 계속 걷는 천은 물이 꽤 불어나 있다. 반시(半時)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모래톱이 쌓여 섬처럼 생겼던 작은 모래 언덕은 온데간데없다. 훤히 드러났던 바닥이 금세 흙탕물에 잠겼다.

갠 날씨에 사람들이 하나, 둘 운동하러 나온다. 그들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민망하면서도 운동량을 다 채우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시도도 하지 않고 마음만 상하기보다 포기할지언정 하자는 주의다. 이런 주의는 때로는 부작용이 생긴다. 가끔 화를 부르기도 하고 오늘처럼 비를 만나 흠뻑 젖기도 한다. 조금씩 젖을 때 멈출 줄도 알아야 하건만 미련하게 고집을 피운다. 자꾸 오기를 부리게 된다.

그때부터다. 할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순간이 오면 하기로, 갈까 말까 하고 주저하는 때가 오면 가기로 작정했던 때가. 지난날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다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아직도 자책으로 남아있다. 괜한 시간만 흘려보내 얼마나 허망했던지. 후회하기 싫어서 한 다짐이 나를 고집스럽게 만들었는가 보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인생에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너무 걱정하며 살지 말 걸 그랬다”가 1위의 답이었다. 늘 아들 걱정을 달고 사는 나로서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언제 과정을 마치고 길이 보일지 모르는 공부 중이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여태 실망을 시킨 적이 없건만 들들 마음을 볶아댄다. 잘하고 있어 믿어만 주면 될 일을 사서 걱정한다고 병(病)이라며 그이는 종종 핀잔을 준다.

이 병(病)은 나로 인한 것이다. 아들의 대학교 원서를 낼 때 고집을 부렸다. 안정권을 썼어야 하는데 내 욕심으로 재수하게 된 것 같아 늘 미안하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고생시키고 허비하게 한 장본인인 셈이다. 죄인인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매달려 있다. 체기로 남아 고질병처럼 앓는다.

내가 아들을 지그시 지켜본다 해도 똑같이 바라보아 줄 리가 만무다. 아마 부담스러워 모른 척 외면하기 쉽다. 상대방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얼굴이 보이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상대가 눈을 피하면 볼 수 없는 눈부처. 연인들에게나 있을 눈부처를 나는 아들에게서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간절한 내 마음에 눈을 맞추어 줄줄 알았다.

여기쯤에서 뒤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어슴푸레 보인다. 시간의 편린이 아슴아슴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하다. 이제 믿어줄 때다. 그에게 저당 잡힌 마음을 조금씩 찾아와야 할 이유다. 더 이상 거기에 온전히 마음을 묶어두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가 생겼다. 아들이 나의 걱정을 간섭이라 오해하여 숨이 질 때, 마지막까지 후회하게 될까 봐 그게 겁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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