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0.09.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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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날씬한 체구에 갸름한 얼굴의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사셨다.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나물을 뜯고, 얼마 되지 않는 밭을 일구며 산 평범한 농부의 아내였다.

슬하에 3남1녀를 두신 어머니는 몸이 허약한 나를 정성을 다해 키워주셨다. 천성이 바지런한 어머니는 밭 매는 일 중 제일 어렵고 힘들다는 조 밭도 풀 한 포기 없이 매 동네에서 일 잘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긴 쉽지 않았다. 한때 절미저축이라 해서 어머니는 밥 지을 때 한 숟갈씩 작은 독에 따로 모았지만, 가난의 굴레는 늘 일상이었다. 가난을 극복하려 해도 되지 않으니 결국에는 어려움의 굴레에서 잠시만이라도 잊을 방도를 찾으셨다. 노래였다. 어머니가 가끔 부르는 노래 하나가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세월이 흘러 누나가 시집가고, 형님도 결혼해 한시름 놓으신 어머니는 오랜 농사일을 뒤로하고 청주로 이사해 새로운 세상에서 사셨다. 잘사는 부자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늘그막이 인생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조금씩 잊어갈 즈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를 먼저 보내신 어머니에게 쓸쓸함이 서려오기 시작했다.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왔다. 이층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그만 굴러 떨어지신 것이다.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고 입원하셨다.

그렇게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어머니의 병세를 가늠할 수 없었다. 웃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겨우 가난을 벗어나 그런대로 작은 행복을 느껴 본 것도 잠시, 다시 불행의 고난 길에 드셨다.

여든여덟이 되셨을 때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함이었다. 작은아들과 살게 되면서 웃음을 되찾으셨다. 매일 목욕도 하시고, 식사도 잘하셔서 안심도 되었다.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아내도 고마웠다.

어머니를 집에 모신지 반년이 지날 무렵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병원을 찾으니 의사가 치매 위험이 있다고 했다. 정신은 흐려지셨어도 식사도 잘하시고, 달라진 것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평안하시니 집안 모두가 평화로웠다. 말씀도 조금씩 하시고, 어쩌다 한 번씩 사람을 알아보실 때도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시작될 무렵 어머니가 전혀 움직이지 않으셨다. 아내는 출근하고, 누님과 둘이 어머니 곁에 앉아 있은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시더니 이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지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주무시는 듯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 삶에 커다란 지붕이 그렇게 사라졌다.

부모와의 인연을 천륜이라 한다.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지금이 되었지만,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 부디 하늘나라에서 잘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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