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란 무엇인가?
도(道)란 무엇인가?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0.09.17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도(道)라는 글자의 형상을 살펴보면, 부수인 왼쪽의 쉬엄쉬엄 갈 착(?)자와 오른쪽의 머리 수(首)자로 이뤄져 있다. 쉬엄쉬엄 간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런 삶을 강조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표현은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결국은 자연스럽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우니 작위적이니 하는 분별조차 벗어나 저절로 발현되는 기지개와 같은 것이 도(道)의 참 모습일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의미의 착(?)자와 머리 수(首)자의 의미를 한데 묶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首)는 ‘머리’를 뜻하는 글자로, 껍데기가 아닌 씨알, 핵심, 본심을 의미한다. ‘나’와 ‘너’가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한 쪽으로 일으키는 욕심이 아니라 지공무사한 하늘의 뜻, 곧 양지-양심을 말한다. 따라서 도(道)란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남으로써, 자신의 주견과 욕심이 아닌 성령의 도구로 온전히 쓰이는 것을 말한다. 불교적 표현으로는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아 증득함 없이 증득함으로써 하늘나라인 니르바나 언덕에 도달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도(道)임을 알 수 있다.
‘나’와 ‘너’의 입장을 벗어난 지공무사한 하늘의 뜻, 우리 내면의 불성(佛性)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며, 무위자연의 도(道)인 까닭에, 순천자존(順天者存) 역천자망(逆天者亡) 즉, 하늘의 뜻인 도(道)를 따르는 자는 존재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게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결국 도(道)란 ‘나’와 ‘너’의 입장을 넘어서 ‘나와 너, 우리’를 모두를 소통시키며 하나가 되게 하는 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道)의 의미가 이와 같음을 알고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도(道)에 대한 알음알이를 하나 더 머릿속에 기억한다고 해서 주변 인연들과 소통하며 함께 행복한 삶이 펼쳐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나는 ‘나’를 위해, 너는 ‘너’를 위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서로 소통하는 것을 도(道)라고 생각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도(道)를 통하기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으로 도통(道通)하려는 그 어떤 욕심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셋째, ‘나’가 없다는 생각을 고집하는 ‘나’가 남아 있는 한 도(道)와는 멀어지는 까닭에, ‘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양변을 내려놓고, 도(道)를 통(通)하려는 ‘나’도, 내가 통(通)해야 할 도(道)가 있다는 생각도 내려놓음으로써,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야 한다. 매 순간 기억뭉치인 업식(業識)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나’라는 잣대를 뚝 꺾어 버리고, 너와 나의 입장을 벗어난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의도를 배제한 채, 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