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메꾸다
틈을 메꾸다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9.1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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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뜨거운 햇살과 눈 겨루기 하는 미니 꽃기린의 눈빛이 더 붉어졌다. 제 키의 열 배는 됨직한 담벼락 디딤돌 위에서 의기양양이다. 베고니아, 페츄니아, 천일홍보다 높은 디딤돌을 가진 자신감이다. 노지露地의 햇빛보다 담벼락의 햇살이 제일인 줄 안다. 고개를 바짝 들고 당당하다.

이웃집에서 화분을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당당한 꽃기린을 받치고 있는 빈 화분을 말하는 것이다. 선뜻 주겠다는 말을 못 하고 주춤거리자 작은 화분을 쑥 내민다. 그냥 달래는 것이 아니라 바꾸자는 것이다. 이유인즉 고무나무를 심은 화분을 깨뜨렸는데, 마땅한 화분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마당을 보니 키 큰 분을 받침대로 쓰고 있는 화분에 심으면 안성맞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본인보다 상대가 더 필요함에도 선뜻 건네주지 못한다. 주자니, 꽃기린이 걸리고, 안 주자니 이웃에게 미안하다.

꽃기린은 꽃이 솟아오른 모양이 기린을 닮았다고 하여 꽃기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선인장과로 햇빛을 많이 받아야 꽃이 풍성하다. 물을 싫어하여 한 달에 한 번만 주고 내리 햇볕만 주어도 반짝반짝 화색이 돈다. 꽃기린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여고 시절 국어 선생님이 시인이셨는데 그 시집 이름이 `꽃기린'이다.

받침대를 주고 나니 꽃기린은 키다리에서 앉은뱅이로 이동했다. 자신이 마술에서 풀려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실방실 웃고 있다. 무엇으로 키를 늘려줄까,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마당을 둘러보니 낡은 걸이개가 보인다. `찾았다!'. 야자수의 동그란 걸이개에 꽃기린을 밀어 넣자 제집처럼 딱 맞는다. 처마에 걸어놓으니 받침대보다 더 높은 곳에 섰다. 바람이 불자 바람처럼 빙그르르 돈다. `잘됐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웃집 화분을 살폈다. 이웃집도 딱 맞는 집이다. 더 예뻐졌다며 옆집 아주머니의 얼굴이 화수분으로 피어난다.

받은 작은 화분을 요리조리 돌려보니 참 예쁘다. 빈 분으로 두기에는 아깝다. 떠오르는 식물이 있다. 연둣빛 호접 난 두 촉을 심어놓으니 난의 품격이 나타난다. 청자에 백토를 발라 구운 분청사기를 닮은 분이다. 연둣빛 호접난이 장인의 손에서 막 깨어난 도자기에 나비가 춤을 추는 것 같다. 그 모습에 반해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러고 보니 이웃집으로 인해 내가 횡재했다. 만약 내 것만 고집했다면 이런 행운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바꾼다는 것은 나의 소소한 것을 바꾸는 것이지만 결국은 전부를 바꾸는 것과 같다. 욕심을 내려놓은 것은 마음이 부자가 되는 길이며, 돌아선 마음을 붙잡지 않는 것은 맑은 영혼의 길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생각을 바꾸는 것, 시대를 바꾸는 것은 누군가의 삶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미뤄두고 멀리했던 반성과 돌아봄이 필요한 날이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우리의 일부가 되어 관계의 틈을 채우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사소한 것들로부터 틈을 메꾸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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