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 가는 길
월계 가는 길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9.1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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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인생은 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보통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삶에 집착하곤 한다. 돈과 명예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속성 앞에서는 결코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됨에도 거개의 인간들은 거기에 연연하고 집착한다. 집착에 찌들어 사는 인생은 어쩌면 가장 초라한 인생이다. 내 삶이 집착에 사로잡혀 초라해질 때, 그것을 치유하는 약은 단연 여행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유희경(劉希慶)도 이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것이다.

월계 가는 길(月溪途中)

山含雨氣水生煙(산함우기수생연) 산은 비 기운을 머금고 물에선 안개가 피어나는데
靑草湖邊白鷺眠(청초호변백로면) 청초호 호숫가엔 백로가 잠들었네
路入海棠花下轉(로입해당화하전) 길은 해당화 아래로 들어 돌고,
滿枝香雪落揮鞭(만지향설락휘편) 가지 가득 향기나는 눈이 휘두르는 채찍에 떨어지네

예나 지금이나 여행은 가끔은 도회지의 번화함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연과의 교감을 추구하여 나서는 것이다. 시인도 속초의 거처를 나서서 청초호를 지나 양양의 월계라는 곳으로 향하는 여행에 나섰다. 시인이 도중에 만난 것은 자연의 풍광들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의연한 모습의 자연은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푸근한 안식을 제공한다.

곧 비가 올 듯한 기운을 머금은 산이나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의 물은 시인에게 언제나 의연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집과도 같다. 백로가 잠든 호숫가는 강아지가 나른한 기지개를 켜는 시인의 마당이다. 자연은 한 마디로 불리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다이내믹한 변화는 아니지만, 결코 변화를 멈추는 법이 없다. 가다 보니 시인의 길에 해당화 구역이 나타났다. 비며 안개며 백로는 슬그머니 무대를 비끼고 해당화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해당화 핀 곳 아래로 길은 휘도는데, 거기에 이르자 채찍에 걸려 흰 꽃이 떨어진다. 시인이 향기로운 눈이라고 한 것은 눈처럼 새하얀 살아 있는 꽃에 다름 아니다.

삶은 긴 여행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때가 끼고 녹이 슨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여행 속의 여행이다. 여행은 단순한 변화만이 아니다. 켜켜이 낀 때와 틈틈이 슨 녹을 씻고 닦아 내 준다. 길을 나서면 만나는 자연이야말로 변화무쌍하면서도 무뚝뚝한 인생 치료사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것이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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