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융합 인재 최석정 선생을 그리며
조선 최고의 융합 인재 최석정 선생을 그리며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9.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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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조선 500년 동안 영의정을 8번이나 지낸 분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 문신 최석정(1646~1715)이다. 청주시 북이면 대율리에 충북도지정문화재 기념물 169호로 지정된 묘소가 있다. 선생은 병자호란 때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 백성을 살리고 역사를 지속하도록 한 최명길의 손자다. 할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온건하고 타협적이고 개방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양명학과 음운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도 조애가 깊었던 학자였다.

최석정은 명문가 집안에서 1646년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17세에 초시 장원을 하고 1671년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며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만 8번을 지냈으니 말 그대로 엘리트 정치인, 관료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노소 분당과 환국정치 속에서, 붕당 정치의 소용이 속에서 정치적인 핍박과 환란을 경험한 정치인 이기도 하였다. 특히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재상으로 입각하였다. 이후 노론세력이 대보단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고, 이어서 그의 저서 `예기유편'이 노론의 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1715년 기로소에 들어갔고, 같은 해 사망하였는데, 후에 숙종 묘에 배향되었다.

정치가이기보다는 직업적인 공무원의 성격이 강해 의리나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행정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선생이 활약하던 때는 양난 이후 국토가 황폐화된 시기로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재빠른 복구를 위해서라도 선생과 같은 실용적이고 융합적인 지식인이 필요하던 시기여서 선생의 역량이 무엇보다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특히 선생은 수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박율의 수학책 `산학원본(算學原本)'의 서문을 써서 적극적으로 독려하였으며, 1686년 중국 출장 때는 서양의 과학서적인 `천학초함(天學初函)', `동문산지(同文算指)'등을 소개해 자연과학 발달을 촉진하였다.

최석정 선생의 가장 특징적인 업적은 서양의 수학을 동양철학에 근본을 두고 정리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선생이 주역철학과 성리학, 그리고 양명학까지 이해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리철학은 수학과 동양철학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인 것으로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수학의 가장 큰 쓰임새 중 하나가 천문과 역법이다. 수학을 좋아했던 최석정은 자연스럽게 천문역법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청에서 들여온 시헌력을 우리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데에 수학을 활용했다고 한다. 또한 기상관측관서인 서운관의 최고 책임자인 서운관영사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의 천문학연구를 전반적으로 관장하기도 했다.

선생이야말로 정치가이면서 공무원이었고, 항상 연구하는 학자였다. 학문적으로는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양의 수학을 융합한 `융합적 인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미래 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인재가 바로 최석정 선생이라 생각된다. 특히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라는 선생의 인품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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