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타다
애가 타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0.08.2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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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논에 벼가 다 팼다. 산책을 해도 여행을 해도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이 좋은 계절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여름 장마가 전국을 심하게 상처를 내고 지나갔다. 54일간의 긴장마가 할퀴고 간 상처로 전국은 아직도 피고름이 줄줄 흐르고 있다.

그런데 또 코로나19까지 확산하여 불안에 떨게 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하루하루 애가 탄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 앞에 우리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친정할머니는 권련을 피우셨다. 권련 초는 잎담배를 담뱃대에 넣어 태우는 것이다. 할머니 담뱃대를 한번 빨아 본 일이 있다. 그때는 그 쓰고 역겨운 권련을 왜 피우는지 몰랐다. 세상 사는 일이 그 권련을 피우는 일보다 더 쓰고 고약한 일이란 것을 사십 넘어 알았다.

할머니는 9남매를 낳으셨다. 그중에 큰 자식부터 넷을 저 세상으로 보내셨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그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단 말인가. 권련을 태워 연기로 뿜어내셨던 것이다.

피운다는 말은 너무나 평화롭다. 태운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속이 썩는 거면 다 썩어 문 들어졌을 겨”라고 하셨다.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말을 알 것 같다.

그때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젊은 시절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참기보다는 화를 내고 타협보다는 고집을 부렸다. 자식을 키워 내야하고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은 한 끼 밥상을 차리는 일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아들이 그제 왔다. 삼 개월에 한 번씩 다녀가던 휴가를 이번엔 팔 개월만이다. 해외에 나가 있어 늘 걱정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의료시설이 낙후된 후진국에 나가 있으니 혹여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어쩌나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휴가는 나왔지만, 아직 얼굴도 못 봤다. 서울에서 자가 격리 15일을 해야 한다. 노래 가사처럼“그냥 바라만 봐도 애가 타. 맘이 너무 아파서 애가 타”는 마음이다. 아들 내외는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보고 싶겠는가. 아직 신혼인 아들 부부를 바라보기조차 민망하다. 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더 애가 탄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루하루 애를 태우는 일인가 보다. 애가 탄다는 것은 창자가 탄다는 것이다. 얼마나 간절하면 창자가 타들어가도록 고심을 한단 말인가. 애가 끓는다, 애 간장이 녹는다는 말을 생각해본다. 뱃속에 있는 장이 끓고 녹을 만큼 무엇이 그리 간절한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일이 그러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봐서 애가 타고 옆에 있는 사람이 아파서, 비가 많이 내려도 가뭄이 길어도 애가 탄다. 애를 태우며 사는 것이 사람만이 아니다. 새끼를 지켜내야 하는 동물은 다 그런 것 같다.

지난밤, 태풍 바비가 지나갔다. 기상청 예보보다 우리가 사는 청주는 순하게 다녀갔다. 고마운 일이다. 바람 바비가 지금 이 지구 상에 떠돌고 있는 코로나19를 몰고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아 더 애가 탄다. 벌써 밤송이도 제법 굵어졌다. 머지않아 벌판은 황금 물결을 이룰 것이다. 누런 논길을 따라 산책하며 이 계절을 즐기고 싶다. 매미가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며 제 짝을 찾는 노래, 애가 끓는다. 애가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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