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다는 건
스며든다는 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08.1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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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찻물이 끓는다. 시끄러운 소리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이럴 때마다 한 대사가 떠오른다. 영화를 소개한 내용 중 물이 끓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그 과정이 리얼하여 마치 영화 속 거기에 지켜 서 있는 착각을 부른다.

처음에는 “솨” 하는 소리가 나고 다음엔 “쿠르르” 바퀴소리가 난다. 이어 땅이 진동하는 소리, 말 달리는 소리가 났다가 모든 소란이 잦아들 듯 은은한 바람소리가 난다. 곧 그 바람소리마저 잦아들고 이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바로 이때가 물이 익은 상태, 순숙(純熟)이라는 것이다.

지금이다. 얼른 커피에 김이 오르는 물을 붇는다. 거기에 프림을 넣자 사르르 커피에 녹아든다. 마치 스며들어가듯 자취를 감춘다. 이윽고 독하던 커피가 연해져 맛이 부드러워진다. 코로나에 장대비까지 구속하는 바람에 차 한 잔으로 침침한 기분을 달래본다.

스름스름 스며든다는 건 본래의 모습을 잃는 법이다. 커피의 진한 색깔이 연한 색으로 변한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안다는 건 그에게 스며드는 일이다. 내가 싫은데도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고 취향이 아닌 영화를 함께 보기도 한다.

상대도 나와 같다. 나에게 맞추며 하나씩 알아간다. 안도현 시인의 시를 빌려와 꽃게에 간장이 배듯 서로에게 조금씩 배어들어 간다. 지날수록 진하게 물들어간다. 우정 아니면 사랑도 깊어지면 순숙(純熟)에 이를 수 있을까.

얼마 전 알게 된 심해아귀를 떠올린다. 이들에겐 극적인 생식의 비밀이 있다고 한다. 아귀는 사랑하면 한 몸이 된다. 수컷은 암컷의 몸에 파고들어가 하나로 되어 평생 살아간다. 자신의 장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정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면 암컷은 영양분을 공급해 준다.

수컷은 어둡고 찬 바다에서 희미한 페로몬 냄새를 통해 암컷을 쫓는다. 몸의 길이가 아주 짧다. 자신의 60배의 큰 암컷의 배를 물어 상처를 낸 뒤 결합한다. 피부와 혈관까지 융합한다니 놀랍다. 암컷은 새로운 장기로 받아들여 면역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제 몸의 면역력도 포기하는 아귀는 완전히 스며들어간 듯하다.

결결이 생각나는 친구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다들 가족 안에 녹아들어 가고 옆에 없다. 한 남자의 아내로 밥을 짓고 있으려나. 엄마로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건 아닐지. 열심히 천수경을 독송하고 있을까. 아니면 성경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가족은 단출하다. 남편과 아들을 다 합해야 세 명이다. 화이트컬러를 벗고 이제는 노동의 현장에서 블랙컬러로 열심히 사는 그이. 쉰을 넘긴 나이에 확 바뀐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짠하다. 서른이 되도록 공부에 매달려 힘들어도 내색 없이 잘 해주는 아들도 마냥 고맙다.

누구 한 명 허투루 사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고 있다. 가족은 이런 생각만으로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암울한 내일에 포기하지 않고 잘 참아낸 오늘의 장한 전사들이다. 이제야 우리 집에 들기 시작한 볕은 은혜로운 햇살이다.

커피에 프림이 녹아들듯 가족에 온전히 스며들고 싶다. 심해의 아귀처럼 파고들어가 한몸인 듯 살고 싶다. 내 삶은 이들 속에 삭혀 들어가 순숙(純熟), 그 꿈을 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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