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위에 그린 추상화 - 리처드 롱의 `자연에서 걷기'
대지위에 그린 추상화 - 리처드 롱의 `자연에서 걷기'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0.08.12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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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누구나 자연에서 홀로 걸어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숲 속이나 산책로에서 홀로 걷는 일은 무리를 지어 걷는 행위와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는 것 또한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홀로 걸을 때는 우리 몸의 감각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자연의 모든 것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다. 몰아일체, 무념무상, 자연과의 합일 등등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것을 혼자 하든 무리를 지어 하든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공통의 목적으로 산책을 하곤 하지만, 영국출신인 미술가 리처드 롱은 `자연 속에서의 걷기'라는 단순한 일상적인 행위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연으로 나갔을까? 1960년대 당시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로서 미술가들이 대자연의 대지로 눈을 돌린 시기였다. 리처드 롱 또한 지구상의 대자연을 미술가들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들을 미술가들이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픽처레스크가되어 `자연 속에서의 걷기'라는 비물질적인 행위를 통해 모더니즘이 간과해온 실제의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진행되는 창작과정을 작품 자체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리처드 롱의 `걷기'는 대지미술로 분류되나 대지에 직접적인 변형을 가하는 여타 대지미술가들과는 구분된다. 그는 자연환경에 대한 훼손 없이 자연 그 자체를 보존하며 작업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예술은 생태미술로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보라는 작가 자신의 신체적 행위가 작업의 핵심요소라는 측면에서는 신체미술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직접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걷기'라는 신체행위를 통해 자연 속에 남겨진 자신의 흔적-걷기로 생겨난 선-들을 작품화한다. 때론 현장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주변에서 조달해가며 작업을 하는데, 그가 걷는 행위를 통해 대지위에 자유롭게 표현한 공간속의 흔적들은 그의 말에 따르면 “세계라는 실제 공간에 놓여진 추상미술”이 된다.

이상애 미술평론가 미술학박사
이상애 미술평론가 미술학박사

 

리처드 롱의 `걷기'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대지위에 남겨졌던 수많은 흔적들의 쌓임 위에 또 하나의 `층의 표시'이다. 그의 `걷기'는 자연이라는 공간 속에서 전개된 시간의 흐름이고, 그 결과물로서의 흔적은 걷는 양에 대한 가시적 표시이다. 또한 목적지를 갖는 여행을 위한 걷기와는 달리 그의 미술로서의 걷기는 목적지가 없는 여정이며, 이러한 여정은 자연을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척도였다. 다시 말해 자연과 동화되어 존재 인식의 과정으로서 수행하는 걷기는 자연의 순환원리에 순응하는 실천이고, 걷기라는 신체노동이 수반되는 동안 자신을 비워내고 자연의 진리를 깨우치는 초월적이고 명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자연의 기록으로서 시·공간을 측정하는 척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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