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잔해
장마의 잔해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08.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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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유년시절 할머니는 절기상 하지(夏至)가 지나면 서둘러 감자를 캐야 한다며 자식들을 밭으로 불러 세웠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니 하루라도 빨리 감자를 캐서 비에 젖지 않도록 보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에 젖은 감자는 금세 썩어버리니 힘들게 지은 일용할 양식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지론이셨다. 그렇게 하지(夏至)와 장마는 비슷한 시기에 서로 맞물려 시작되곤 했다.

오래된 시골 농가 주택이니 광이며 집안 천장에 서생원들이 살았다. 쥐를 잡기 위해 한 집 걸러 고양이를 키웠는데 할머니께서는 이때에도 당신의 오랜 삶의 촉과 감으로 장마에 대비하셨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는 제비를 보면서 장마를 가늠하셨다. 제비가 둥지에 있지 않고 자주 마당을 낮게 날면 우기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고, 평소에 조용하던 고양이가 돌아다니며 울기 시작하면 조만간 비가 올 징조이니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집 주변을 단속하셨다.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대형박물관이 불타 없어진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대중매체가 활발한 시대에는 그저 웃고 넘길 지나는 이야기 같지만, 장마철이 도래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어린 시절에 들었던 할머니의 말씀이 습관처럼 되살아난다.

예년보다 늦게 시작된 장마가 길게 이어지며 잔인한 폭우를 동반했다. 어느 지역에선 산사태로 평생을 함께한 집을 잃었고 수년 동안 아무 이상 없이 잘 가꿔온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전화기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지인들로부터의 하소연이다. 제법 자란 고추무게에 줄기가 쳐지지 않도록 지지대에 줄을 쳐 준 지 겨우 한 달이 지났건만 강한 빗줄기에 밀려 내려온 토사로 모두 묻히고 말았단다. 또 어떤 이는 봄부터 땀 흘려가며 실하게 키운 참깨가 많은 비에 쓸려 넘어졌다며 울상이다. 전국 각지에 나가 흩어져 있는 일가친척들이 서로 안부를 묻느라 정신이 없다.

비 한 방울이 간절했던 때도 있었다. 지난봄 시골집 뒷밭에 서너 골을 내고 고추를 심었다. 가을철에 수확하면 올 김장에 요긴한 고춧가루가 될까 싶어 시작한 일이다. 마당 안 텃밭에는 상추를 비롯한 가지며 토마토 등 갖가지 채소도 심어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 부모님과 형제들을 불러모아 가든파티를 할 요량이었는데 제때 비가 내리지 않아 수돗물 퍼 나르느라 본의 아니게 부모님이 고생하셨다.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빗물이 쓸고 간 흔적으로 상처가 깊다. 백 세를 바라보는 마을 어르신들조차 올해처럼 긴 장마와 많은 폭우는 생전 처음이란 말씀을 하신다. 봄부터 여름내 땀 흘려 키워낸 농작물을 잃어버린 농민들의 한숨이 들려오는 것 같다. 한순간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 손을 놓아버린 상인들의 울먹이는 텔레비전 속 영상이 내 일처럼 안타깝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내려주면 더없이 고마운 빗물이련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 장마도 물러가는 때가 있으니 여름다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면 우리는 한층 단단해져 장마의 잔해에 맞설 것이다. 상처가 아물고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온기 있는 손을 보태 그들의 고통에 분담의식을 가져보자. 서로 보듬어 안는 자세야말로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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