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과 평화 사이에서
휴전과 평화 사이에서
  •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 승인 2020.07.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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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영 변호사의 以法傳心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67년 전 7월 27일은 한국전쟁 3년 만에 휴전이 성립된 날입니다. 1950년 7월 1일 맥아더 장군의 요청에 따른 美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스미스부대(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 일부)가 최초로 한반도에 투입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국제전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北進)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국군 6사단(지금은 철원의 청성부대)이 압록강물을 마시며 한반도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음에도 중국인민지원군의 전격적인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라는 뼈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高地戰)과 같은 지리멸렬한 전투를 벌이면서도 휴전협정을 위한 최초 접촉이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대령급 예비회담으로 시작된 이래 총 765회의 회담을 거쳐 2년 17일간 각종 회담의 결과로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엄청난 폐허를 낳은 한국전쟁의 결과이자 한반도의 분단을 규율하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또는 정전협정)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미국으로부터 휴전협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동맹관계의 수립을 약속받았고,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인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휴전하는 것에 급급하다 보면 휴전협정문을 종잇장 정도로 치부하고 언제든 공산군이 전쟁을 재발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한국이 침략받는 경우 미국의 자동개입조항이 반영되진 못했으나 미군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미국의 자동개입에 준하는 효과를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한미동맹의 전쟁억지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휴전 이후 70년이 다 되어가도록 통일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휴전협정의 한반도 규율이 기형적으로 길어지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당시 휴전협정이 의도한 바는 아닐 것입니다. 서울대에서 국제법을 담당하는 이근관 교수는 이를 두고 `전쟁과 평화의 중간 상태'또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제3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휴전협정이 전면전을 막아왔고 휴전 후 새로운 한반도 질서를 설계하기 위해 휴전협정은 실효되었다고 보아 전쟁상태의 종료를 전제로 지금을 평시상태로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쌍방에 의해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는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 규정에 따라 명확하기 때문에, 지금의 한반도 안보질서는 여전히 휴전협정에 의해 규율되는 전시상태입니다.

2018년 남북·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종전선언 추진 노력은 휴전체제의 한반도 규율이 기형적으로 길어지는 것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전선언은 휴전체제를 넘어 평화협정의 시대로 가기 위해 고려되는 절차는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종전선언이 되더라도 휴전체제인 이상 법적으로 종전은 아니기 때문에 종전선언 이후 후속하는 평화보장절차가 조속히 마련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종전, 법적으로 전시(휴전)라는 혼란스러운 한반도 질서가 다시 형성되고 맙니다. 종전선언에 얽매여 제도적 평화를 신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북 상호의 실질적인 평화 회복 노력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변호사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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