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서면
갈림길에 서면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7.2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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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산을 걷다 보면, 혹은 운전을 하다 보면 숱하게 만나는 것이 갈림길이다. 목적지가 있는 경우라면,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살피거나 방향을 잘 판단하면 될 일이다. 여러 갈림길에서 한 번이라도 잘못 들어서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테니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낭패는 되돌아가거나 해서 바로 잡을 수도 있지만, 목적지가 없이 떠도는 경우라면,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연한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곤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시습(金時習)은 정처 없이 떠도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겪는 갈림길 증세가 있었다.

갈림길에 서면( 峴)

驟雨暗前村(취우암전촌) 소나기로 앞마을은 어둑하고
溪流徹底渾(계류철저혼) 시냇물은 온통 탁하네
疊峯遮客眼(첩봉차객안) 겹친 봉우리가 나그네의 눈을 막고
一徑入溪源(일경입계원) 골짜기 물 따라 길 하나 나 있네
靑草眠黃犢(청초면황독) 파란 풀밭에 누런 송아지 잠들었고
蒼崖叫白猿(창애규백원) 푸른 낭떠러지엔 흰 원숭이가 짖네
十年南北去(십년남북거) 십 년 동안 남북으로 돌아다녔건만
歧路正銷魂(기로정소혼) 갈림길에 서면 애가 타누나


시인은 언제나처럼 낯선 곳을 지나는 중이다. 때는 마침 장마철인지라 수시로 비를 만났는데 이 날도 소나기를 만났다. 비가 세차게 내리자, 시야가 어두워져 방금까지 보이던 앞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불어난 시냇물은 온통 흙탕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막하기만 한 갈 길이 더욱 막막해진 것이다. 첩첩으로 쌓인 봉우리들이 시인의 눈을 가로막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물줄기 따라서 난 길 하나를 찾은 것이다. 길을 따라 무작정 가다 보니 파란 풀밭 위로 누런 송아지가 보이기도 하고, 푸른 절벽에 매달린 흰 원숭이가 보이기도 한다. 이미지가 선명한 낭만적 풍광이지만, 시인의 갈 길은 변함 없이 막막하기만 하다. 남북으로 이렇게 떠돈 것이 어느덧 십 년이지만 갈림길에만 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평생을 방랑자로 살지는 않는다 해도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방랑자이다. 목적지를 정해도 그것이 꼭 지켜지는 게 아니고, 또 가는 도중에 숱한 갈림길을 만나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떠돌면서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겪는 황망함을 두려워만 해서는 그 삶이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생의 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설렘의 연속으로 바뀔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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