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남 1
물러남 1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0.07.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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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물러날 때가 됐다. 물러나는 건 이중의 과정이다. 세상에 나오는 건 힘든 일이다. 우리는 수억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악착같이 태어났다. 왜 그렇게 악착같은 노력을 했을까? 모른다. 인간의 생각으로 답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태어난 것으로부터의 물러남은 죽음이다. 그게 두 번째(마지막) 물러남이다.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태어난 후 자신을 세우는 일도 어렵다. 모두가 자신을 세워 세상에 나서기(立身出世) 위해 불철주야 준비하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래서 이룬 사람은 칭송을 받고 못 이룬 사람은 스스로 좌절하고 뭇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설사 이뤘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世間)으로부터 사라져야 한다. 이건 철칙이다. 꽃도 피면 지고(花無十日紅), 권력을 잡으면 놓게 되어 있다(權不十年). 세간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물러남이다.

물러나는 자는 가진 것을 내려놓고 양보하며 역사와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 남은 자는 물러나는 자의 배턴을 이어받으며 손뼉을 치고, 물러나는 자는 약간의 슬픔과 함께 허허롭게 떠나야 단순한 그림이 성립한다. 이어받으려 하는 자가 뺏으려 하거나 물러나는 자가 내놓지 않으려 하면 그림이 복잡해진다. 이긴 자는 이겨서 기뻐하고 진 자는 져서 슬퍼하는 것이 엄정한 그림이다. 지고도 안 졌다고 하면 그림이 이상해지고 복잡해지는 법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이 복잡하면 잘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가급적이면 단순하게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나이가 들어서도 삶이 복잡하다는 건 물러설 줄 몰라서이다. 언젠가는 후대에 밀려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 삶이다. 삶의 무대는 젊은이들의 몫이고 늙은이들은 물러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이긴 자, 남아 있는 자의 아량을 요구한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물러나는 자, 진 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승자의 기쁨을 인정하고 곧 물러나는 자의 비애를 감내하여 삶의 현장에서의 인간살이를 단순하고 멋지게 만들어줘야 할 의무도 있다. 사람들은 져 놓고 지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치지 않는다. 깨끗이 졌다고 승복을 하는 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긴 자를 기뻐하게 하고 진 자는 슬퍼하는 단순 논리를 지켜주는 것이 후일을 도모할 때 훨씬 유리하다.

연구실의 책, 냉장고, 싸구려 오디오, 소파 등을 다 갖다 버렸다. 치우고 보니 그동안 많이 채우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에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필요할지도 몰라서 버리지 못하던 것들이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칼로 매듭을 끊듯 확실하게 정리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물리적으로는 물러날 준비가 돼 간다.

남은 건 정신적 탈출이다. 탈출보다는 은둔(隱遯)이 더 어울린다. 은(隱)이란 숨는다는 뜻이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면 되고 둔(遯)은 달아나서 숨는다는 뜻이니 지금 있는 곳을 떠나 산속으로 숨으면 딱 좋을 것 같다. 둔(遯)은 하늘(≡) 아래 산(≡)이라는 뜻이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 뫼이니 분수 넘치게 나대지 말라는 말이다. 둔괘(遯卦)는 마음을 맑고 곧게 하고 이로움을 조금만 취할 것(小利貞)을 권고하고 있다. 물러나는 자가 취해야 할 도리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물러나는 자가 도리를 지키며 물러나려 할 때 남아 있는 자들이 지켜줘야 할 것도 있다. 숨으려 하는 사람을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러나길 싫어하는 사람에게 점잖게 “이제 그만 하시지요.”라고 권고를 하는 건 모양이 된다. 그런데 사라지려 하는 자를 끌어내 도마 위에 올림으로써 물러나지 못하게 하는 건 그림이 아주 안 좋다.

두 번째 물러남의 단계, 곧 삶으로부터 사라질 준비는 하는 건 세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다음에 얘기하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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