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과 나잇값
밥값과 나잇값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0.07.08 17: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원의 단말쓴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은퇴하여 백수건달로 살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더러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밥값이고 나잇값입니다.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는 것 같고 헛되이 나이만 먹는 것 같아서입니다.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이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로 좌충우돌하며 살았으나 어렵사리 집도 장만했고 두 아들 교육시켜 성가 시켰으며 자식들에게 손 내밀지 않을 정도의 노후대비도 되어 있어 놀고먹을 자격도 에헴 하며 살아도 되리라 여겼지요.

하지만, 그건 자위였고 착각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마땅히 치러야 할 인생살이의 통과의례인데 무슨 큰일이라도 한 것 마냥 시건방을 떤 겁니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처럼 그리 살아야 하거늘.

하여 새삼스레 밥값과 나잇값을 반추해봅니다. 아시다시피 값은 사고파는 물건에 일정하게 매겨진 액수 또는 어떤 사물이나 일에 매겨지는 평가나 값어치를 의미합니다만 노력이나 희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무수한 값 중에 가장 셈하기 어렵고 객관화하기 어려운 값이 있으니 그게 바로 밥값과 나잇값입니다. 밥값은 수고의 값이자 생명의 값이고 나잇값은 연륜에 따라 삶의 무게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값이기 때문입니다.

밥은 일용할 양식이자 삶을 영위하는 필수 에너지원입니다. 그러므로 밥값은 생존 값이며 밥값을 한다는 건 제 몫의 일과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을 대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듯 밥값을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빈축을 사고 스스로에게도 자존감과 존재감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인생살이의 성패와 행불이 밥값을 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있음입니다.

나잇값도 그렇습니다. 나무가 그러하듯이 나이를 먹으면 먹은 만큼 삶의 내공이 쌓여 중후해지고 지혜로워져야 하지만 그리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모든 사람이 15세에 지학(志學)하고, 30세에 이립(而立)하고, 40세에 불혹(不惑)하고, 50세에 지천명(知天命)하고, 70세에 종심(從心)하며 산다면 굳이 나잇값을 셈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처럼 나이가 들수록 나잇값을 더 많이 셈하여야 한다는 함의가 숨어 있고 기대치도 높아 나잇값 하며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나잇값이 거꾸로 매겨지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꼰대로 폄하되고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거든요.

어른과 노인이 대접받고 존경받던 사회 즉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시대에서 능력의 유무와 차이에 따라 대접과 존경이 달라지는 능력유서(能力有序)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세상에는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잇값 못 하는 사람들의 무기가 바로 나이입니다. 수틀리면 대뜸 `야 너 몇 살 먹었어?'라고 힐난하며 나이로 제압하려 드는 얼간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요즘 시중에 회자하는 최악의 욕설은 `나잇값 좀 해라'와 `밥값 좀 해라'입니다. 나잇값, 밥값 못 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그런 욕을 먹어도 변화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주먹다짐을 벌일 수도 있고 심지어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할 수도 있으니 삼가야 합니다.

문득 `태어나서 인생 처음으로 늙어가고 있다. 늙는 것은 두렵지만, 처음이기에 설렌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뇌리를 스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나이 듦은 처음 가는 길입니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생경하고 애틋한 길이지요. 바라건대, 남은 생 하루하루를 설렘으로 맞이하고 마주치고 부딪치는 자연과 인연들에 깊이 감사하며 사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설사 밥값과 나잇값을 못하고 산다는 핀잔을 들을지라도.

/시인·편집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