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서리
참외 서리
  • 이창수 시인
  • 승인 2020.06.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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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수 시인
이창수 시인

 

“야 어떤 게 익은겨”언놈이 “큰걸루 따”또 누가 “배꼽을 눌러봐 배꼽이 몰랑몰랑함 익응겨”소곤소곤하는데 느닷없이 “요눔덜”하며 콩밭 고랑이 벌떡 일어나며 내 옆에 녀석 뒷덜미를 덮썩 움켜잡는다. 잡힌거다.

기겁을 해서 다리야 나 살려라 하며 내빼는 뒤통수를 밭주인의 큰 소리가 때리고 순간 우리는 우뚝 섰다, “여기 한눔 잡었어 느덜 누군지 다 알어 그냥 내빼문 낼 느덜집에 순사 보낼 껴 존 말루 할 때 일루와”참외밭 주인 큰소리에 감전돼서 그 자리에 발이 붙어버린 거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부르니 지척에 두 명이 있고 소리를 높이니 또 한 명이 대답한다. 냅다 뛴 방향이 모두 집 쪽이다. 한 명은 얼떨결에 논두렁에 접어들어 빨리 뛰지 못하니 아예 납작 엎드려 있었다.

네 명이 도망간 방향이 모두 우리 동네 쪽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만 해도 망월산에 늑대가족이 살고 있었고 말뚝을 박아 지은 돼지우리는 심심치 않게 늑대에게 털리던 시절이었다. 날 저물고 어둑어둑하면 마을 벗어나는 것도 등골이 서늘한데 산골짝 밭에서 내빼니 마을을 향해 뛸 수밖에.

누가 그런다 “야 어떡하지? 진이가 잽혔어”낼 맞아 죽어도 오늘은 내빼고 싶은 판인데 또 한 명이 그런다 “할 수 읍서 맞아 죽어두 가야지”의견이 합쳤다 “그래 가자”의리 없이 내뺄 수는 없었던 거다.

밭주인이 또 소리를 지른다 “○○이 아들 여기 잡어 놨응깨 올템 오구 실으문 오지 마 낼 느덜 집에 가서 참위 밭 체 넘길겨”할 수 없이 대답부터 “예”해놓고 맥이 쭉 빠져갔다.

그래도 의리는 있어서 네 녀석이 다 제 발로 간 것이다, 서두의 대화는 여기서 주고받은 이야기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힐끗 쳐다보니 건넛마을 집안 아저씨다 덴찌(손전등의 일본식 말) 불이 내 얼굴에 오며 “요놈새끼”소리와 동시에 눈에서 불이 번쩍한다. 엄청 아픈 꿀밤이다.

그날 밤 우리는 참외는 따보지도 못하고 바늘도둑으로 잡혀서 쇠 도둑 취급을 받으며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를 열 번도 더 복창하고 밤이 이슥해서야 따 논 참외 1개씩을 얻어먹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훔치는 재미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수박 참외 도적질은 도적으로 치지 않고 서리라 하고 네 자식도 내 자식처럼 훈도하는 것이 먹혀들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살아 있어 이 정도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저녁 먹고 마당에 멍석 깔고 모깃불 피우고 라디오만 틀어놓으면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다 모여 뉴스 듣고, 연속극 듣고 밤이 이슥하도록, 보릿고개 이야기 고지쌀(한말로 한마지기 논에 모내고 김 매주고 풀 뜯어줘야 하는)이야기 장리쌀(쌀 한말 빌려 먹고 보리때 보리쌀 두 말로 갚아야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인심만은 그랬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그때보다 더 가난한가? 자본주의 세상에 밥걱정 안 하고 살며 이기적 감성만 키워 인성이 극단적으로 변해서 그런가?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에 의지해서 사는 게 세상살인데.

부의 속성이 사람 사는 세상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불만이 많게 하고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며 생각을 극으로 치달리게 하는가?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하는데 우리에게는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에 의지해 사는 세상으로 바꾸어볼 그런 기회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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