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케치
여름 스케치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6.2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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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일 년 사계절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각 계절을 대표하는 풍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쩌다 그림의 명인이 그려 낸 계절의 모습을 보게 되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름을 대표하는 풍광을 못 정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조선(朝鮮)의 시인 박상(朴祥)의 시를 보면 고민이 절로 풀릴 것이다.


여름 스케치(夏帖)

樹雲幽境報南訛(수운유경보남와) 숲과 구름 깊은 곳에 남쪽 소문 전한대도
休說東風捲物華(휴설동풍권물화) 동쪽 바람이 좋은 경치 말아 갔다고 말하지 말라
紅綻綠荷千萬柄(홍탄록하천만병) 푸른 연줄기 천만 그루에 붉은 꽃 터지니
却疑天雨寶蓮花(각의천우보연화) 하늘에서 연꽃을 뿌린 줄로 알겠네

아무리 깊은 산 중이라 할지라도 사람 소식은 닿지 않지만 계절 소식은 어김없이 전해진다. 무성한 숲과 구름으로 에워싸인 깊은 산 속에 누가 가져 왔는지는 몰라도 남쪽 소식이 전해졌다. 내용인즉슨 동쪽 바람이 봄의 화려한 풍광을 모두 멍석 말 듯 말아서 가져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쪽 바람에 대한 음해일 뿐인 남쪽 발 가짜 뉴스이다. 그러니 이 말을 더 이상 퍼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시인이 기거하고 있는 깊은 산 속에서는 전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화려한 풍광을 누군가 말아 가기는커녕, 그것을 누군가 업그레이드 해서 가져다 놓았다. 수많은 녹색 연잎 가지가지마다 붉은 꽃이 터져 나와 있는 것이다. 시인이 보기에 이러한 풍광은 결코 땅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리라. 보배로운 연꽃을 하늘이 비 내리 듯 내려 보낸 것이 아닐까 시인은 의심 아닌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숨어 사는 사람에게도 여름은 찾아온다. 봄의 화사한 풍광을 앗아간 여름이 아니라, 녹색 잎 위로 가득 터진 붉은 연꽃을 선물로 한 보따리 싸들고 찾아온 보물 같은 존재가 바로 여름이다.

하늘에서 비처럼 연꽃이 떨어지는 장면이야말로 여름 스케치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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