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 생각하다
유월에 생각하다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06.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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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하루에 한 번은 꼭 빨래를 하셨다. 아침마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빨래판과 빨랫방망이를 들고 강가로 향하셨다. 그 당시만 해도 마당에 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집에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강가로 나가야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그 터에서 사시사철 빼놓지 않고 늘 방망이를 두들겼고 두어 시간 후 머리에 잔뜩 빨랫감을 이고 돌아오셨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한 겹씩만 벗어놓아도 산더미를 이루던 빨랫감들은 엄마가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에 뽀얗게 새 옷처럼 되었다. 겨우내 묵혔던 숨은 때도 엄마가 휘두르는 방망이질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다소 힘에 부치는 큰 이불빨래는 널찍한 대야에 비누가루 세제를 푼 다음 발로 겅중겅중 밟아가며 때를 빼기도 하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육십여 년을 사신 엄마는 스무 살에 아버지와 중매로 만나 시집을 오면서부터 빨래를 하셨단다. 병상에 계신 할아버지의 이불빨래부터 어린 시동생의 양말까지, 나중에 고물고물 자식들이 태어나면서 빨랫거리도 늘어났단다. 겨우 식구들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전답과 집 한 채가 전부인 시댁이라는 곳에서 엄마의 고단한 시집살이는 지금도 소설책 몇 권은 나온다며 회상하시곤 한다.

엄마의 뇌리에 가장 오래 남는 살림의 기억은 병상에 계시는 할아버지의 이불빨래였단다. 자주 이불에 `실수'를 하셔서 하루도 빨래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며 고단했던 시절을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세탁기는커녕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었다며 한겨울에 강가에 나가 바짝 얼은 얼음을 깨고 맨손으로 빨래하고 나면 손등은 온통 벌겋게 얼어 있기 일쑤였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처마 밑 빨랫줄에 아무리 꽉 짠 빨래를 널어도 금세 고드름이 맺혔단다.

할아버지의 오랜 병환은 한국전쟁이 남겨준 최악의 상흔이었다. 아버지가 열 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할아버지는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차출되어 죽음이 난무하는 그 살벌한 현장에 서 계셨다고 한다. 신록이 눈부신 시절에 집을 떠난 뒤 두 번의 계절이 돌고 돌아 어느 한 날 겨우 집으로 돌아오셨단다. 하지만 건장한 모습으로 집을 나섰던 할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지팡이에 의지해 다리를 절며 겨우 집을 찾아온 병객의 모습만이 당시 할아버지께서 시시각각 삶의 사선을 넘나들었는지 감지할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할아버지의 흔들리는 눈빛과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함의 손떨림을 나는 기억한다. 집 밖 출입이 거의 없으셨고 가끔 마당을 나서는 것이 당신 일과의 전부였다. 한여름 장마에 천둥 번개라도 치면 귀를 막고 이불 속으로 숨기 바빴고 한밤중에 느닷없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후미진 구석을 찾아 엎드렸다.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무참히 파괴된 삶을 사셨고 불행한 남은 생을 사시다 가셨다.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전쟁의 역사는 점점 뒤로 물러나 잊히고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가족에겐 전쟁이 남긴 상처로 힘든 유월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로서 당시의 참혹함을 오롯이 실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경건함으로 누군가의 희생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엄마가 평생 할아버지의 이불빨래를 하면서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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