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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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06.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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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꽃수레에 장미향을 가득 채운 오월의 월삭(月朔), 비에 갇혔다.

장대비가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한다. 하필이면 주차를 하고 막 내리려는 찰나에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얄궂다.

차 안에 우산이 없어 멎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잦아질 틈을 주지 않는 통에 한 시간이나 넋을 놓고 비를 지켜보았다.

비는 시간을 거슬러 유년인 나로 데려다 준다.

장마가 끝난 동네의 개울물은 많이 불어나 있었다. 며칠을 물놀이를 못했던 터에 너나 할 것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물살이 센데도 겁도 없는 나이였다. 평소엔 물이 무릎 아래에 오지만 가슴까지 차였다. 신나게 수영을 하는 중에 신발이 벗겨져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잡으려고 따라갔지만 물살이 나보다 훨씬 속도를 내 신은 멀리 도망을 갔다. 며칠을 졸라 얻어 신은 새 신발이다. 운동화가 싫다고 떼를 써서 엄마가 큰맘 먹고 처음으로 사준 구두였다. 막내고 하나인 여식에게 준 특혜임을 모를 리가 없다.

물에 비친 노을이 다 사라지도록 둑에 앉아 울었다. 하늘이 쿵하고 무너지는 첫 경험이었다.

구두 한 짝을 든 맨발의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없는 형편에 사준 신발을 잃어버렸으니 혼날 생각에 죄인모양으로 집에 들어섰다. 엄마를 보자 울음이 먼저 터졌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꾸중 대신 괜찮다며 꼭 안아주셨다. 그때는 어려서 혼을 내지 않은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이 엄마의 사랑 법임을 커서야 알았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다. 그리움을 소환하여 비가 가슴 깊은 진동이 된다.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핑계가 좋았다. 목울대까지 찬 울음을 토해내어야 했다.

언제부턴가 울 기회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넘칠 듯 고인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내 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통증으로 욱신거린다. 갈등으로부터 오는 고단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내느라 견디었던 시간들이 나를 덮쳐왔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일제히 물줄기를 내어 서러움의 강으로 흘러넘쳤다. 물은 우렁우렁 소리를 내며 나로부터 흘러가고 있었다.

한바탕 펑펑 울었다. 내 평생 울었을 울음을 다 쏟아내었다. 지쳐 쓰러진 내게 고함이 들려왔다. 바닥을 치며 나보다 더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차의 지붕을 때리며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 나를 위해 울어주는 곡비(哭婢)였다. 얼마나 절절한지 내 안에 스며들어 마음을 쓸어 만진다. 해일에 휩싸였던 온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아 고요해지고 있었다.

가장 슬픈 사람을 대신하여 울음으로 저승길을 밝힌다.

계집종으로 예전에 양반가에 상을 당했을 때 상주 대신 곡을 해야 했다. 저승 가는 사람들의 길을 인도하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최고의 곡소리로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는 곡비다.

이제 답답하여 쉬어지지 않던 날숨을 뱉는다. 바다 속 해녀들이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마지막 한번을 더 참을 것인지, 물 밖으로 나갈 것인가를 가르는 마지막 숨인 물 숨을 내쉰다. 여기까지다. 한 곳에서 28년이면 잘 견디었다. 최선을 다했고 죽을힘을 다해 살아온 시간이었다. 더 이상 미련을 갖는 일은 바다에서 해녀들이 내 숨만큼 있어야 하는 순간을 넘기는 것과 같다. 욕심을 부리다가 때론 숨이 삶과 죽음을 나누기도 한다. 이 순간, 그 선에 서 있다.

비가 와서, 마침 우산이 없어서 참 다행인 날이었다.

그날, 나는 울음을 차 안에 꽁꽁 가두어버렸다. 문을 잠그며 바라본 유리창. 거기에 해탈(解脫)한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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