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가 덤이다
하루 하루가 덤이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6.02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술이 과했나 보다. 벌써 아침이다. 새벽 동이 트기를 기다려 현관문을 여는, 여느 때와는 다른 아침이다. 머리가 조금은 아프고 멍한데 얼마 전 부화한 박새가 어미를 찾는 소리는 부산하게 들린다.

아침의 공기가 답답하다. 창문을 열어 외부의 공기를 들여도, 냉수를 마셔도 영 마땅치 않다. 매주 주말의 이슬방울에 느끼던 싱그러운 아침이 아니다. 그래도 움직이던 몸인지라 멍한 상태에서 집 앞 도로, 비질을 마치고 아침은 거르고 누웠다.

그렇다고 편히 쉬는 것도 아니다. 한시도 쉼 없이 움직임을 기억하던 몸인지라 이내 자리를 턴다. 그렇게 예전의 몸과 오늘의 몸이 실랑이를 거듭하면서 오전이 지났다. 그간 몸이 축나긴 했었나 보다. 끝내 숙취를 이겨내지 못한다. 이런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반나절을 지나 햇살은 여름의 일사강도만큼의 풍부한 햇빛으로 녹음이 짙어지는 감나무잎 사이를 뚫는다. 햇살은 잔디에 나뭇잎 문양을 선명하게 새긴다. 짙은 녹색으로 색을 바꾸어 푹신푹신한 두터운 탄력을 가진 잔디는 길량이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제법 뜨거운데 잔디의 푹신함이 고양이의 발목을 잡았다.

오늘은 텃밭이며 뜰 정리며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오후의 시간을 즐긴다. 멍 때리기다. 간만에 오디오를 켜고 클래식이며 뉴에이지 CD를 번갈아 가며 올린다.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CD, 한 소절 멜로디에서 묻어나는 감성이 무르익을 무렵, 만개한 선인장 꽃에 눈이 멈추고 음악은 들리지 않는다.

매년 피어나던 꽃인데 오늘따라 무리지어 피어 장관이 펼쳐진다. 분명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봤을 터인데,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화사함의 군무에 눈을 떼지 못한다. 선인장의 작열하는 선홍빛의 꽃만큼 강한 햇살이 오후의 절정인 시간을 알린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시간이다. “열매도 달지 못하면서 꽃을 피웠다”, “봐달라고, 나 충분히 이쁘다”고 한마디 아내가 내게 답한다.

오후 느지막이 햇빛이 한풀 꺾였다. 텃밭 쪽은 벌써 서쪽의 둥구나무에 걸려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루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텃밭으로 발을 옮긴다. 힘겹게 자란 비트, 쑥갓, 상추 등 쌈채소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 자벌레는 잎사귀 끝에서 오늘 갈아먹을 만큼을 측정하듯 몸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출몰하지 않은 민달팽이는 지난밤의 흔적을 잎 앞뒷면에 지도처럼 새겨 놓았다.

잎사귀 하나를 놓고 경쟁은 없다. 너무나 먹을 것이 많기에, 그래도 생존의 경쟁에서 먹히고 먹혀도 키우고 키워 꽃대를 올리고 씨방을 달았다. 그리고 꼬투리가 여물었다. 쭉정이 아래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씨앗이 떨어져 있다. 내년이면, 아니 비가 온 후엔 유채가 자라고, 아욱이 자라고, 겨자가 자라고, 상추가 자랄 것이다. 내어주고도 내어, 살벌한 싸움에서 버텨내고 만들어낸 옹근 씨앗이기에.

매일매일이 그렇듯 오늘 하루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잠을 청하기 전, 술이 과하게 취해서도 오늘 하루는 괜찮았지? 그래 오늘 하루는 견디기 힘든 하루였지만, 잘 버텼지. 어쩌면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시간보다는 무엇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마무리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옹근 씨앗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들어야 할 것에 집착한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청한 잠, 한숨 잠에서 깬 아침은 새날이다. 나에게 주어진 덤이다. 오늘도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매일 변하지 않는 건 본인 몸이 아파도 출근하는 날이면 매일 침대 가장자리에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을 다림질해서 가지런히 올려놓고, 갈아입을 때면 셔츠의 단추를 채워주는 아내의 손 매무새와 나를 바로 보는 얼굴뿐.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새날. 난 오늘도 하루의 덤을 얻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