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이 식지 않을 거리
국이 식지 않을 거리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05.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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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몇 년 전부터다. 자기주장이 강해져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억지소리를 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친정엄마와 친자매처럼 지냈던 안사돈께서 소천 하셔서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게 하고 싶은데 모시러 가는 일조차 망설이게 했던 거리감으로 생목을 오르게 했던 분, 그런 엄마를 오랜만에 만났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가 유난히 하얗다.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시는 모습에 울컥한다.

한 세대로 독립했을 때도 당신의 의무처럼 나를 끊임없이 보살폈었다. 환희와 보람의 절정에 섰을 때보다는 부족함으로 힘들고 절망적이면 당연하다는 듯 수시로 드나들던 친정집이고 의지하던 엄마였다. 남의 자식들은 평범하게 잘들 사는데 그러질 못하는 딸을 지근거리에 두고 혹여 잘못될까 애를 태우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던 날이 많던 걸 안다. 알면서도 변한 모습이 낯설어 자꾸 외면했다.

가까이 사는 내 딸도 수시로 집을 오간다. 밥하는 게 귀찮으면 오고 엄마 밥이 먹고 싶으면 온다. 이것저것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느라 몸은 고달파도 올 때마다 반갑고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의 친정엄마처럼 결혼한 자식이라도 부모의 책임감은 늘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내 딸이 살아가면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 길을 잃어도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챙기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어쩌다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으면 아무리 부정적인 이야기라도 공감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자식이니 가능한 일이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도 가까운 거리가 변함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딸하고는 국이 식지 않을 거리에 사는 게 좋다고 한다. 애틋하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문제는 거리조절에 실패했을 때 생긴다. 너무 가까우면 휘둘리고 상처받기 쉽다. 친정엄마는 치매증상으로 사고가 예전과 달라졌어도 딸과의 거리는 변함없다고 생각하신다. 만만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퍼붓지만, 딸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넘어서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얼마나 섭섭했을까. 멀어진 거리감에 버림받는 것처럼 상처를 받으셨을 것이다. 나 여기 그대로 있으니 가까이 오라고 억지소리를 하고 자식 속을 뒤집어 놓았을 터이다. 나도 딸이 너무 자주 오면 정신없이 휘둘려 고단하고 오지 않으면 벌써부터 소외되는 것 같아 쓸쓸하고 불안해지는데 성치 않은 노구로 문밖출입도 어려운 엄마의 마음은 오죽 불안했을까.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리 있는 사람이 있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도 늘 곁에 있은 것처럼 가까운 사람도 있다. 거리에 따라 상처를 받기도 하고 버림도 받는다. 책임을 져야 하는 거리도 있고 손해를 보게 되는 거리도 있다. 버림받거나 버림을 당하는 거리도 있다. 모든 관계가 국이 식지 않을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면 만족할까.

야윈 엄마 손을 잡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영정을 바라보시는 눈빛이 처연하게 흔들리신다. 사돈이면서 자매처럼 지냈던 분을 떠나보내면서 홀로 남겨진 외로움에 저리도 섧게 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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