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의 선물
수레의 선물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5.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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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울퉁불퉁 산길을 지나 삐걱삐걱 달구지를 끌고 대문 앞에 쏟아놓은 한 무더기의 봄. 논, 밭 개울가에 피어나는 농부의 미소처럼 움큼움큼 꽃향기 쏟아져 나온다.

자연은 가난한 사람만 초대했는지 봄을 향해 오는 이들의 몰골이 기이하다. 비쩍 마른 몸통에 표정없는 낯빛, 수분이 빠져나간 두 다리는 휘청거린다. 도랑 타고 돌부리를 넘어 느릿하게 걸어온 비포장도로에 매캐한 겨울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봄은 비포장처럼 삐걱대며 온다.

봄을 이어받은 가로수길, 이팝나무는 보글보글 하얗게 타고 있다.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꽃송이는 봄의 잔칫집에 초대받은 이의 수레에서 나온 선물이다. 바랄 것 없는 식물들이 놓아둔 향기에 우리는 흠뻑 취한다. 5월은 마음이 풍족한 사람들의 것이다.

모내기준비가 한창인 논둑 옆 도로를 자동차로 달린다. 농로에 이팝나무꽃이 만발해있다. 하얀 쌀밥이 비에 젖어 곧 쏟아질 것만 같다. 벼농사를 시작하라는 신호 같다. 비를 뚫고, 길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이팝나무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다. 파도를 타듯 꽃송이에 올라 어머니의 긴 손등에 내려앉는다. 상상만으로 잠깐 행복한 부자가 된다.

몇 년 전부터 도로 옆에 이팝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도 사람처럼 세대교체를 한다. 1세대의 가로수 나무는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였다. 은행나무는 열매의 냄새 때문에 차츰 사라지고 있고, 플라타너스는 노후 속도가 빨라 가로수의 역할을 못 하게 되었다. 이제 희고 향기로운 이팝나무가 가로숫길을 빛내고 있다.

봄 소식을 알리던 분홍빛 벚꽃이 지고 나면, 한해 농사의 시작과 5월의 꽃이 피기 시작한다. 오월의 눈꽃인 이팝나무꽃이 피고, 하얀 수국과 찔레꽃, 흰 장미가 청신한 오월을 빛낸다. 신선한 녹음은 오월 축제의 절정이다.

지난주 조병화문학관을 갔을 때다. 문학관 마당을 빙 둘러 핀 꽃들이 젖은 채 땅에 누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꽃은 산사나무꽃이었다. 여느 사찰에서 보던 뭉게구름 같은 흰 꽃과는 다른 담홍빛의 겹꽃이었다. 담홍빛의 꽃을 처음 보는 거라 요리조리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손톱만큼 꽃을 꺾어 코에 바짝 갖다 댔다. 비에 젖은 꽃의 향기는 봄비에 사라지고 비릿한 몸만 남아있었다. 어쩐지 젖은 향기가 아쉽지 않았다. 마치 다음을 약속하는 것처럼.

산사나무는 조병화 시인의 생일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한다. 담홍빛 꽃이 열정적인 조병화 시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 무구한 오월의 얼굴이 볼 빨간 산사나무꽃과 붉은 장미의 달로 바뀌고 있다.

푸른 하늘만 우러러보아도 울렁거리는 계절인 오월은, 덩굴장미의 봉오리만 보아도 왈칵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희망과 꿈을 가지기도, 지난 추억에 젖기도 하는 오월이다.

마을 뒷켠에 수레를 내려놓고 떠난 고집 센 이는 누구였을까, 사람의 모습이 세월 따라 변하고, 가로수 나무가 교체되고, 계절은 아무도 모르게 슬쩍 선물을 옮겨 놓았다. 산새들도 웅성웅성 떠드는 계절, 오월이다.

도종환 시인의 오월의 편지를 접어 재작년에 떠난 아우에게 보내야겠다. 먼 세상의 그도 오월을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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