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의 밀어
벌의 밀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05.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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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알라, 보잘것없는 나무에 저토록 많은 벌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상한 일이다. 가지에 잎만 있을 뿐 꽃은 보이질 않는다. 어쩌다 다른 꽃들에 눈길을 주다가 곁눈질로 한번 거쳐 가는 나무. 측백나무가 옆에 있는 인동덩굴 덕에 물을 한 모금 얻어먹는 중이었다.

물세례를 받은 나무 안에서 벌들이 수도 없이 날갯짓을 하며 빠져나오고 있다. 멀리 날아가지도 않고 주위에서 맴돌다 물줄기가 그치자 다시 안으로 일제히 파고들어간다. 마치 집 밖이 무서워 엄마 품에 파고드는 어린아이 같다. 다시 금세 나무속으로 사라지는 벌들이 왠지 낯설다. 농막에서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나무다. 키가 내 배꼽까지 오는데 위로 뻗은 비늘 모양의 잎은 속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다. 수로 보면 윙윙 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한데 어찌 그리 조용한지 감쪽같았다.

벌은 꿀을 모으려 꽃을 쫓는 법이다. 꽃도 없는 나무에 벌들이 버글버글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신비스런 광경이 혼란스럽다. 잎을 손으로 훑어 맡아보니 달콤한 향이 난다. 이 향이 꽃인 줄 착각하고 몰려든 것일까. 혹시 벌이 측백나무를 좋아하는지 몰라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알아낸 것은 서양측백나무라는 것밖에는 없다.

벌은 꿀이 많은 곳을 발견하면 먼저 집으로부터 오가는 길을 익힌다고 한다. 기억비행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비행을 연습할 때도 떼로 벌통 앞 주변을 날아다니는 연습을 한다. 낮놀이로 불린다. 자기 집의 위치와 주변 환경을 익히는 훈련인 셈이다. 혼자서는 절대 꿀을 따지 않는다. 동료에게 가서 이를 알려 함께 꿀을 모은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무의 향에 빠진 벌이 다른 벌들을 끌어들인 것인가 보다. 향기에 흠씬 취해 빠져나오지 못하는 듯 보인다.

겉보기엔 볼품없는 밋밋한 나무다. 종일 지켜보아도 여전히 측백나무 안엔 벌들이 떠나질 않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벌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깊어지던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선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지금 측백나무가 눈에 띈 데는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여 부초처럼 홀로 떠있는 내게 측백나무가 온 이유였구나. 볼품없는 나무지만 벌들을 품을 수 있었던 향기를 전하고 싶었던 게다.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힘껏 안아주지도 못하는 내게 전하는 밀어(密語)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 젊었을 때는 외모에서 찾으려 했다. 나이가 들면서 말과 행동으로 배어 나오는 은은한 향을 가진 사람이 좋다. 어떤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는 깊이가 없다. 오래 남지도 않는다. 잠시 향수를 뿌려 낸 향일 뿐 금방 날아가면 그만이다.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올 때 어느 순간 주위엔 사람들이 생긴다. 그냥 좋기 때문이다.

“좋은 내가 되어야 좋은 네가 온다”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맴돈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왔다가도 떠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런 이가 온다 한들 내가 그를 몰라본다. 부디 알아보지 못해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네팔에서는 인생을 사계절로 나눈다. 25세까지의 봄은 학습의 시간이고 50세까지의 여름은 적응의 계절이다. 75세까지의 가을은 참회다, 그 후 겨울은 자유의 시기다. 제법 여러 걸음 들여놓은 내 생의 가을날.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 오지 않았으니 거기에 미치지 못함이다.

이제 참회로 삶이 겸손해져야 할 때다. 앞으로 더 그윽해져야 할 일이다. 내가 향기로워야 비로소 그들이 나에게로 와줄 테니까. 그리하여 향기로운 이들과 어우렁더우렁 자유의 시기를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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