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이션은 따뜻하다
카네이션은 따뜻하다
  •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0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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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저 멀리 어머니가 서 있다. 언제 불러도 다정한 이름, “엄마”하고 부르면 아랫목에 묻어둔 고봉밥처럼 따뜻해진다. 아직도 식지 않은 어머니의 손길이 남아 어버이날이면 참회록을 쓰게 한다. 기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어버이날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문명 속에 우리는 세월을 핑계 삼아 식어가는 가슴을 자위自慰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듯 은근슬쩍 넘겨버리려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 몇 세대가 지나면 이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괜한 기우杞憂도 해 본다.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살다가 보니 부모와 자식 간에도 넘나들지 못하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어버이 없는 자식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늘 때늦은 후회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는 주자의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처럼 말이다. 함민복 시인은 어머니의 눈물이 짜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어머니가 가슴으로 흘린 눈물이 무슨 맛인지 잘 모른다. “눈물의 자식이 망할 수 없습니다.”라는 위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말이다.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임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임은 나와 같이 계신 건만 나는 임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임에게서 멀리했나이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이 비단 절대자에게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닫는 시간이다.

살다가 보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두 분의 아버님을 떠나보낸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내 곁에는 한 남자만 덩그러니 있다. 셋 아이는 타국과 타지에 살고, 시어머니는 요양원에 친정어머니는 이웃에 산다. 지금 싱싱한 카네이션을 달아줄 수 있는 분은 유일하게 친정어머니뿐이다. 오늘도 쑥버무리 해 놓았다고 가져가라고 부르신다. 어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문뜩 그리움으로 찾아와 울컥하게 하는 사람이 머잖아 사라질 그것으로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내 딸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바다 건너 저편에 사는 딸이 어버이날이라고 선물과 향기나는 조화를 보냈다. 인터넷 발달로 용돈도 받았다. 거실 한 곳에 카네이션 바구니를 놓고 아이들을 생각하며 케이크를 먹는다. 입대한 지 2주 된 훈련병 아들로부터 축하의 전화도 받았다. 장남은 아직 소식이 캄캄하다. 장남과 나 사이에는 아직 오늘이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한 엄마의 딸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이 세상에 온 것에 감사한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아침에는 네 발이었다가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 되는 동물이 뭐냐고 한 수수께끼처럼 우리는 출생과 삶, 죽음이란 여정을 통과의례로 지나야 한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지팡이 대신 어르신들이 바퀴 여섯 개 달린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유모의 시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여로는 수수께끼 상자 속을 오가는 것은 아닐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머지않아 땅속으로 침몰할 우리의 그림자. 두 발로 서서 다닐 수 있는 한정된 시간 속에 가정에 달을 맞아 가족과 이웃을 돌아본다. 코로나로 요양원 방문사절이라 물품 속에 동봉해 보낸 조화를 받아본 치매의 어머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가까이에 사는 친정어머니 가슴에는 생화를 달아 드렸다. 어머니는 카네이션에서 달달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한 송이의 카네이션이 어머니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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