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왕들
대한민국의 제왕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4.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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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대한민국에는 전국에 247명의 제왕이 존재한다. 연전에 한 평론가가 했던 말이다. 광역단체(특별시·자치시·자치도 포함)장 17명과 기초단체장 230명을 이른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이 가히 제왕 수준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록을 통해 조선시대 왕권을 살펴보면 반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다 정확히는 “지금 대한민국에는 제왕 이상의 권력자 247명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조선시대 왕들은 언론기관인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끊임없는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을 제외하고 왕이 신하들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은 “불가하니 재고하소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궁 윤씨 폐비를 둘러싸고 성종과 신하들이 충돌한 사례를 보자. 성종은 후궁에 대한 윤씨의 투기가 극심해 왕비의 자격이 없으니 대궐 밖 친정으로 내치겠다며 이혼을 선언했다. 3사와 대신들은 아녀자의 하찮은 투기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고 왕비를 추인한 중국의 입장도 살펴야 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성종은 왕의 가정사에 제3자들이 이렇게 간섭할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신하들은 왕비를 별궁에 일시 유폐했다가 반성하면 다시 부르자며 물러서지 않았다. 대비까지 나서 왕의 편을 들고나서야 윤씨 폐비와 출궁이 이뤄졌지만, 이후에도 다시 불러야 한다는 신하들의 압박이 거듭됐다. 성종이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것은 신하들의 간언이 지긋지긋 했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왕들은 끊임없는 감시도 받았다. 사관이 왕을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기록했다. 사관의 동석 없이 왕이 누군가를 독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사관은 왕의 언행만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왕과 관련한 동향과 풍문까지 기록해 사초(史草)로 남겼다. 이 사초들은 실록청에 보관했다가 후대에 왕의 실록을 만드는 자료로 활용됐다.

사초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세조가 죽은 아들의 후궁들을 은밀하게 곁으로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사관이 왕이 며느리와 정분이 난 것 같다는 소문까지 소상히 기록해 실록청에 보관한 것이다. 세조는 조카(단종)를 왕좌에서 쫓아내고 사약을 내린 비정한 군주이다. 그가 생전에 이같은 사초의 존재를 알았다면 토네이도 급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사초는 물론 실록청의 업무에 간여할 수 없었고, 연산군을 빼고는 이 룰을 철저히 지켰다. 신하들이 자신의 추문을 기록해 보관하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은 왕, 그 것이 조선시대 국왕의 실체였다.

지금 대한민국 단체장들은 예산과 인사는 물론 각종 사업의 기획에까지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며 조선시대 제왕이 부러워 할 정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형사범죄를 저질러 직을 상실하는 형을 받기전까지는 누구도 이 권한에 제동을 걸기 어렵다. 지방의회와 언론, 시민단체 등이 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견제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권유와 촉구의 수준에 그칠 뿐이다. 아무리 합당한 비판과 지적이라 하더라도 단체장이 외면하면 그만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단체장을 주민들이 파면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가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이 제도가 발동해 물러난 단체장은 없다.

단체장 잘못 만나 지역은 정체되고 갈등과 분열이 일상이 된 지자체가 적지않다. 단체장 뽑는 절차만 갖추고 감독과 감시장치는 챙기지 못한 허술한 자치제도 탓이 크다. 오거돈 부산시장의 직원 성추행 사태도 절대권력이 견제받지 않을 때 초래될 재앙중 하나다. 권력에 만취해 직원을 자신의 어떤 요구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적 고용인 정도로 착각했을 것이다. 지자체마다 왕의 독선을 견제하던 3사와 실록청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유권자들의 책무만 더 커졌다. 시민이 맡긴 권력을 두렵고 겸허한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혜안을 길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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