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에서 생명을
박제에서 생명을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4.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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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산길을 오른다. 비탈길이 사람의 발길로 반지르르하다. 나무 사이로 달려나가는 바람을 타고 낙엽 하나가 빙그르르 몸을 말려 연둣빛 나무 옆에 몸을 누인다. 듬성듬성 핀 산벚꽃잎이 나비처럼 현란한 춤사위를 그리며 날아간다.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갈 길을 잃는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멧돼지 발견 시 대처요령'의 현수막이 눈앞에 들어온다. 이곳에 혼자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우르릉 쾅'하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근육이 파드득 떤다.

용암동 원봉공원을 돌아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마라톤 산악훈련 코스이기도 하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등산로이다. 초입에서 조금 올라서면 다양한 운동기구들이 있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정상까지 갈 수 없으면 이곳 운동기구를 이용하여 운동할 수 있다. 정상까지는 왕복 두 시간쯤 걸렸다.

지구개발로 등산로는 반으로 줄었다. 조용하던 숲이 기계의 소음으로 시끄럽다. 등산로 여기저기에 `통로준수, 추락위험'이라는 붉은 줄이 둘러쳐 있고 터널 공사로 발파 작업할 때 이동을 멈추어 달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작은 산등성이에 올라 내려다보면 깎여나간 공원 일부가 폐허처럼 산만하다. 숲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위협처럼 자리를 잡아간다. 멧돼지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빈집처럼 쓸쓸해 보인다.

중간쯤 올라오자 어르신 한 분이 낫으로 무언가를 자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덩굴식물을 쳐내고 있다. 어르신 말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이렇게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둘러보니 죽은 나무가 서넛 있다. 덩굴식물 하면 언뜻 떠오르는 식물은 으름덩굴과 다래나무 그리고 가시박과 칡덩굴이다. 어떤 식물인가 들여다보니 으름덩굴이다.

으름덩굴은 꽃잎을 밀어올리고 있다. 잘려나간 가지에는 몽글몽글 꽃망울을 달고 곧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짠해졌다. 굵은 몸통을 가질 수 없으니 무엇에라도 손을 뻗쳐 수직으로 서고 싶은 것이 으름덩굴의 마음일 것이다. 덩굴식물인들 깊이를 마다하지 않으랴.

작년, 지인과 시골 어느 식당에 갔을 때 처마에 매달린 으름 열매를 처음 보고는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배고픈 기억이기도 할 으름 열매는, 도시개발로 잘린 숲처럼 사람에게서 소외되고 있다.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이 아픈 것을 볼 때처럼 안타깝다. 자연은 크고 작고 귀하고 천한 것이 없이,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재산이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크고 작은 것을 선별한다. 한 생의 임무를 가지고 왔음에도 우리의 잣대를 들이댄다.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덩굴식물은 든든한 배경이 없는 노동자 같다. 힘없는 노동자는 서로의 손을 잡고 힘을 키운다. 그 힘으로 부당함에 맞서기도 한다. 그것은 권력으로부터 잘리지 않기 위한 외침이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파울로 코엘류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했다.

허물어져 가는 몸뚱이를 집어들었다. 숨을 다해 가는 나무의 소망을 박제해 사무실 안의 풍경으로 두어야겠다. 덩굴식물에 숨을 나눈 앵두나무에도 착생식물인 풍란을 심어 다시 생명을 피우도록 해야겠다. 그것은 우주를 경외하는 첫 번째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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