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과 물결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정, 괴산 남파정(槐山 嵐波亭)
산바람과 물결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정, 괴산 남파정(槐山 嵐波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20.04.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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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괴산 남파정 전경.
괴산 남파정 전경.

 

불정면(佛頂面)은 괴산군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본래 충주군의 불정면이었는데,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괴산군에 편입되었다.

불정(佛頂)이라함은 석가모니불 정수리의 공덕을 인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며, 불정존(佛頂尊)은 모든 불상 중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불상이라고 한다. 지명을 통해서 이 지역이 한때 불교의 성지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많은 불교 유적, 유물과 전설이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목도리(牧渡里)는 불정면의 면소재지이다. 예부터 음성천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들판서 말을 많이 길러 `목나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낮은 산을 두고, 너른 들을 질러 달천(達川)이 지나는 목도리는 장호원-음성-목도-연풍-문경 혹은 장호원-음성-목도-입석-상주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1959년 불정면 지역과 감물면 지역을 이어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나루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비로봉 서쪽 계곡에서 발원한 달천은 여러 지역을 지나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불정면 사람들은 달천을 목도강이라고 부른다. 목도강변은 예부터 마포나루에서 출발한 새우젓과 소금을 가득 실은 크고 작은 범선들이 닻을 내리고, 괴산의 농특산품인 고추, 콩, 참깨, 담배 등과 물물교환을 하던 큰 항구였다. 그러나 해방 후 하천을 통한 물류교통이 쇠퇴하면서 지금은 번성했던 목도장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곳 출신의 안학준(安學濬, 1892~1976)은 목도의 풍광을 형상화한 사언율시 「가동팔경(佳洞八景)」을 남겼는데, `목도강 십리물길 돌아오는 돛단배(鶩湖歸帆)'를 제7경으로 꼽았다.

남파정(波亭)은 목도 가야리(佳野里) 안말 입구에 동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목도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승지이다.

이 정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인 진안대군(鎭安大君)의 후손인 이태호(李泰浩, 1861~1943)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금하여, 1901년(광무 5)에 건립하였다.

목도리는 전주이씨 진안대군 후손들이 많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사건을 피해 신기리(新基里) 도락동(道落洞)으로 낙향한 진안대군의 고손(高孫) 이우(李瑀)가 입향조이다.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1354~1394)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다. 고려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의판서와 밀직부사를 지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가족을 이끌고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이성계는 그의 굳은 뜻을 알고 `우리 가문(家門)의 백이숙제(伯夷淑齊)'라 칭(稱)하며, 고향인 함흥에서 살도록 했다. 그는 왕의 장남이면서도 벼슬을 버린 채 여생을 보냈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남파정(波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파정'이란 정자 이름은 개성에 있는 진안대군의 묘소에 정조가 지은 비문 중에서 `산에도 색깔이 있으니 남기(嵐氣)가 그것이고, 물에도 무늬가 있으니 물결이 그것이다.(夫山有色, 嵐是也, 水有文, 波是也)'라는 글귀에서 유래한다.

남파정은 주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정자로서, 뒤편에 위치한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청덕사(淸德祠)와 함께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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