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계
멈춰버린 시계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20.04.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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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거실 한쪽 벽에 아주 오래된 벽시계가 있다. 노포에서 구입한 엔틱시계는 건전지로 작동된다. 시계추가 있음에도 괘종시계처럼 똑딱이는 소리도 없이 묵묵히 움직이더니만 아예 멈췄다.

햇볕 좋은 날, 출근준비를 하면서 힐끔 올려다본 시계는 아직도 삼십분 정도 여유시간이 있었다. 아침 삼십분의 여유는 하루를 한갓지게 만들고 모처럼 짧지만 여유 있는 시간은 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는 짧은 시간, 행복에 젖어 커피를 음미하며 핸드폰기록의 일정을 보다가 눈을 의심케 했다.

벽시계와 핸드폰의 시계가 달랐다. 벽시계의 건전지수명이 다되어 더디게 가고 있었던 거다. 아뿔싸, 삼십분 여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삼십분 지각이었다. 시동을 켜는 순간 아차! 핸드폰을 두고 나오다니, 늦었는데 더 늦게 생겼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쓰려는 것처럼 덜렁거리다 외려 더 늦어졌다. 핸드폰이 없음 한시도 지낼 수 없는 우리들, 먹이를 낚아채는 송골매처럼 쏜살같이 달려가 핸드폰을 챙기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건망증 때문에 괜스레 쓴웃음이 인다.

시간이 멈췄다. 여전히 공손히 인사하시는 어르신, 몇 번을 만나도 매번 처음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이하시는 어르신의 시계는 과거에 멈춰 있다. 아니 기억장애를 일으키는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 계절과 상관없이 본인이 입고 싶은 옷으로 화사하게 몸단장을 하시는 어르신이다. 겨울임에도 얇은 옷을 입으려고 고집을 피우는 고집불통이지만 예쁜 할머니로 통한다. 경로당화장실에서 방문을 찾지 못해 방황하시는 어르신, 같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다가도 뜬금없이 누구냐고 태연하게 물으셔서 주변 사람들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금방들은 이야기도 기억을 못 해 늘 빛없는 동굴 속을 헤매는 기억장애, 모든 걸 새까맣게 잊어 마치 처음 듣고, 보는 것처럼 재미있어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의 본능, 원초적 본능일까? 얼굴에 가루분을 바르고 가느다란 브러쉬로 발갛게 립스틱까지 바르는 몸단장은 한결같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것을 멈춰진 시계처럼 기억 저편에 두고 있음에도 오로지 화투놀이만큼은 누구보다도 탁월하시다. 계속 진화되고 있는 것처럼 고스톱담요 앞에선 눈이 번쩍번쩍 생기가 돌고 멈춰진 시계는 온데간데없이 언제나 어르신 앞에는 따다 놓은 십 원짜리 동전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야속하리만큼 매순간 기억을 잡아먹는 괴물 같은 치매는 이상하리만큼 늘 어르신 주변을 맴돈다. 고스톱을 치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시면 공중에서 끝없이 흩어지는 기억들, 거짓말처럼 바로 옆에 들어오는 방문을 찾지를 못해 배회하신다. 오로지 앞만 보이고 옆은 보이지가 않는 것처럼 직진이다. 치매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들어가는 열쇠를 잊은 것뿐이라는데 순간적으로 시계가 멈춰 방문을 찾지를 못한다. 그럴 때면 감정 기복은 격하게 시소 타기를 한다.

먼 길 달려온 봄바람이 인다. 마중물처럼 꽃바람이 일면서 끝없이 봄을 재촉하면서 온몸을 휘감지만, 기억 저 너머에서 서성이는 어르신도, 이탈을 소망하는 내 모습도 허허롭기만 하지만 오늘만큼은 멈추고 싶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다만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거다. 소확행의 행복을.

난 부러 건전지를 교체하지 않았다. 그렇게 더디게 돌아가던 시계가 멈추고도 며칠이 지났다. 어쩜 어르신의 멈춰진 시계는 무겁게 내려앉은 삶이 힘겨워 비워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아름다운 하프선율이 울려 퍼질 것 같은 벽시계를 오도카니 앉아 보고 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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