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의 봄
영춘의 봄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0.03.1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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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그녀가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차 꼬리를 영춘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여사도 차창 밖으로 영춘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영춘에게 그간 몇 개월은 신혼생활 못지않은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비록 부부는 아니지만 오순도순 다정스럽게 살았다. 몇 달 전 영춘의 마을로 오여사가 펜션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한여름 바람도 쐴 겸 그곳에 오게 되었다.

영춘의 마을은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휴양지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여사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을 뽑고 말았다. 일이 어긋나 버린 오여사는 점심도 굶은 채 터덜터덜 길을 걷다가 업친데 덮친 격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졸지에 다급해진 오여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영춘의 집 처마 밑으로 우선 몸을 피신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영춘은 자기집 처마 밑에 비를 피하고 있는 오여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영춘의 눈에는 오여사가 늘 보았던 주변 여인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뽀얀 얼굴과 한껏 치장한 외모가 영춘을 긴장시키며 관심을 끌게 했다. 영춘은 점잖은 어조로 오여사에게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느냐고 말을 건냈다. 오여사가 소나기를 탓하며 실례를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영춘은 대문을 열고 오여사에게 정중하게 비가 그치는 동안 집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가라고 권하였다. 순간 그의 인심과 배려에 어디선가 흑기사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차 한 잔을 마시며 오여사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고 오여사 또한 이 집이 안주인 없는 민박집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얼마 후 비가 그치고 오여사가 그 집에서 발길을 떼려는 순간 영춘은 오여사에게 민박집을 같이해볼 생각이 없냐고 발길을 붙잡았다. 오여사 또한 때마침 바라던 바였기에 쾌히 승낙을 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민박집에 기대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그렇지만 흐뭇한 시간은 어느새 순식간에 흘러간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여사가 딸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집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영춘은 당황스러워했다. 기약도 없이 떠나는 그녀가 왠지 이제 가면 영영 못 볼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영춘에게 그녀를 붙잡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벌써 그녀가 떠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영춘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집 밖을 서성이거나 먼 산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하루하루가 마냥 우울한 시간들 속에 영춘이 지쳐갈 무렵 깜짝 놀랄 전화가 왔다. 그녀였다. 딱히 이유도 없이 봄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소리 같았지만 영춘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금방 봄이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만남은 인연을 만들고 누구에게는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많은 것이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남녀의 만남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만남이란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만남의 공간과 시간은 별도로 정해져 있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누구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열어 놓고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도 우정도 경쟁도 거기에 진정한 만남에 가치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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