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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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승현 청주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3.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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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산업1팀장

 

바람에 실려 정처 없이 날리는 솜털이 있습니다. 하얀 솜방망인 듯한데 다가가기만 해도, 가까이 다가서 꺾어 보려 해도 이내 흩날리는 아주 못마땅한 녀석입니다. 꽃대를 아주 조심스레 손에 쥐고 입술을 오므려 `후~'하고 길게 붑니다. 가을 높다란 쪽빛 하늘을 배경 삼아 멋진 비행을 보여주는, 대공에서의 이별을 아름답게 미화시켜 그려내는 녀석이죠.

너른 들녘이나 논 밭둑에 나지막이 포복하듯, 움츠린 듯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청초한 색으로 확실히 보여줍니다. 땅 위에 보이는 모습은 아주 미약합니다. 그러나 번식력과 재생력은 그 어느 녀석들보다 강합니다. 땅 밑으로 자신의 몸체보다 60배 이상의 뿌리를 내립니다.

며칠 공기 중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뿌리를 1센티미터 정도로 잘게 썰어 심어도 싹이 나오죠. 다른 녀석들은 거창하고도 아름다운 신화를 간직하고 있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리 내세울 만한 화려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삶에 이래저래 도움을 줄뿐입니다. 먹을거리에서부터 약재로, 문장에, 노랫말에, 예술작품에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이 녀석은 세계를 두루 떠돌아다니는 잡초가 되었습니다.

내 주변의 삶터에도 이 녀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미술작가가 재생과 희망을 메시지로 폐기된 생활용품을 활용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홀씨가 광장 입구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0.6평의 공간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상했던,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분이 22개월이라는 수감시절 운동시간마다 돌보며 길렀던 반려식물 중 하나. 그 갈망은 씨를 퍼트려 주변에 희망과 용서의 메시지가 되어 매년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녀석에게는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의 존재성에 뿌리내리고 꽃피우는데 저해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희망의 불사신으로 불리는 민들레입니다.

긴긴 겨울은 봄을 기다리며 꿈꾸는 시간입니다. 겨울은 좌절의 계절 암흑의 지루한 버팀의 시간이 아닙니다. 몸은 움츠렸지만 뿌리는 더욱 세밀하고 강해집니다. 양질의 꽃을 피우는 것은 양분이 아니라, 멀리 까지 뻗어 있는 뿌리와 세세한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혹한에 신념을 꺾지 않았기에 더욱 의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장목으로 쓰일 정도로 마딘, 더디 자라는 회양목은 교목이 아닌 아주 작은 관목입니다. 울타리도 아닌 경계목 정도로 쓰일만한 아주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화려한 꽃도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꽃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벌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꽃이 피었음을 인지합니다. 향이 더 없이 달달하지만 색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인간의 코를 끌지 못합니다. 더디고 더딘 인내의 시간을 갖고 쉽게 보이는 화려한 꿈이 아닌 진솔한 꿈을 꾸는 회양목의 진면목은 오롯이 벌만이 압니다.

올 것 같지 않던 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찾아옵니다. 향보다 햇살부터 몸속 깊숙이 파고들어 몸이 달달합니다. 겨울 뒤에 있어 봄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움츠렸던 모습 이면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꿈을 꿨던 시간이 있었기에 달달한 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겨울의 혹한이 더 할수록 꿈을 키우는 의지는 강해졌습니다.

빕니다. 마지막 꽃샘추위 끝에 내리는 마중비입니다. 꽃눈을 방울방울 달았던 나뭇가지는 눈을 틔우고, 대신 빗방울을 옆에 대롱대롱 달았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향을 실어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끕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마스크를 벗게 합니다. 그간의 답답함 속에서 가슴속 깊게 그윽한 향이 스밉니다. 기나긴 삭풍의 시간이 끝나감을 전하는 달달함입니다. 긴 겨울의 끝을 이긴 봄에 꽃을 봅니다. 그 꽃은 이 모든 것의 최고 상태, 이 세상 최대의 그 무엇(The flower of all)입니다. 최고의 상태를 꿈꾸는 회복의 봄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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