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에 매달린 그리움
처마 끝에 매달린 그리움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20.01.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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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동치미 국물처럼 살얼음이 살짝 언 겨울이면 시골마을 처마엔 메줏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새끼줄에 모과처럼 못난 메주 허리를 꽁꽁 동여매어 처마 밑에 엮어 매달아 말렸다. 어느 정도 꾸덕꾸덕 해지면 신줏단지처럼 귀한 대접을 받으며 안방으로 모셔진다. 퍼런 곰팡이 꽃을 피우며 메주가 발효될 때쯤이면 특유의 구린내가 옷가지며 이불까지 온 방을 점령해 코를 막고 다녔다.

그런 메주가 사라졌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서서히 흔적 없이 사라져가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린 추억만 메주 대신 그리움을 아름아름 매달아 놓았다. 생전 어머닌 장독대에 가득한 독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 하셨다. 햇장은 뒷줄에 자리 잡고, 앞줄 묵은장은 딸내미 집으로 보내려고 독에 배가 부르도록 채우셨다.

이제는 처마 끝에 메주도 궤궤한 장 띄우는 냄새도 더 이상 맡을 수가 없다. 시골집 장독대에 빈 독이 생기기 시작했고 독 사이에 뿌연 거미줄엔 흘러간 시간이 들러붙어 있다. 된장도 항아리 속에서 숨을 쉬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머니 손길을 기다리다 허기가 진 것인지 가장자리가 말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된장독 가장자리는 가뭄의 논바닥처럼 척척 갈라져 마치 메줏덩어리가 들어앉아 있는 듯했다. 손길이 닿지 않은 고추장 역시 오래 먹어 검게 변해 들떠 있는 것이 아픈 기다림을 토로하는 것 같다. 그렇게 빈 독엔 어머니를 잃은 서러움과 그리움이 채워지고 있다.

묵힐수록 장맛이 더 좋아져 오래 묵은 장맛이 일품이라지만 손길이 닿지 않은 장독대는 주인 잃고 떠도는 나그네와 흡사했다. 간장독을 열고 고개를 숙이자 둥그런 거울이 떠 있고 그 속에 내 얼굴이 일렁이며 한참을 바라본다.

기억 끄트머리 유년시절이 달려온다. 당시 아버지 친구 분들의 정거장은 우리 집 사랑방이었다. 농한기 겨울철이면 칼국수로 야식을 즐겨 해 드시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셨다. 국수로 야식을 드시던 중 양념장이 부족하자 내게 간장을 부탁하셨다. 요즘 겨울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지만, 예전 겨울은 참으로 추웠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고 살이 에이는 칼바람과 매운 추위와 맞서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 뒤뜰에 있는 장독대까지 심부름하기엔 춥고 무서워 마루를 서성이다 잔꾀를 부렸다. 언 손을 호호 불며 “간장이 얼어 못 떠 왔어요”하고 빈 종지를 상위에 내려놓았다. 어른들은 박장대소하며 방안은 뒤집혔다. 어른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장독대까지 갔다. 오지 않았고, 잔꾀를 부려 심부름하지 않은 행복감에 난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 후론 야식을 드실 때면 “간장이 얼어서 못 가져 오지”하시며 아예 심부름을 시키시지 않았다. 간장이 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난 동네 어른들의 귀여운 놀림 꾼이 되었다.

흙냄새가 향기로워지고 토종 장맛을 잊지 못하는 요즘, 희끗희끗 허연 머리로 고향을 찾는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고향엔 간장이 얼었다고 놀리시던 어르신들도 한 분 한 분 먼 곳으로 떠나셨고 빈집이 늘어만 갔다. 그렇게 멀게만 느꼈던 장독대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고 툇마루도 뜯겨 서양식 입식으로 개조돼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놔도 이젠 메아리조차 찾을 길 없다.

장을 숙성시키는데 으뜸이라는 장독대 밑 자갈도 모두 들어내고, 시멘트로 반듯하게 단장해 시대에 발맞추고 있다. 모든 것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게 당연하지만, 어머니 뱃속 같은 고향, 뚝배기 된장국이 몹시 먹고 싶은 오늘, 궤궤한 장 띄우는 냄새가 그리움으로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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