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엄상수 4
향엄상수 4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19.12.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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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그대가 밖을 향해 공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
오직 그대들의 수처작주(隨處作主)가
곧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네.

반갑습니다. 무문관(無門關)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禪)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하는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제가 상주하고 있는 산골 초암에는 고요한 도량에 산새 소리만 가득하네요.

이 시간에 살펴볼 공안은 진퇴양난형 공안인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4입니다.

삶의 맥락을 떠난 쟁점적인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은 우리에게 삶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들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때는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쟁점에 대한 침묵을 무기(無記)라고 하는데요. 세계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혹은 영혼과 신체는 다른가? 같은가? 와 같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부처님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면 제자들은 쟁점에 빠져서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스님에게 하소연하러 왔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갑갑한 자기의 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스님을 찾아온 것이지 스님에게서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측은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나 자식들 보기가 민망하기도 하여 답답한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지요. 단지 할아버지의 바람기를 응징하려고 했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이 경우에 스님은 그저 자비의 미소와 함께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할머니의 답답한 마음을 공감하여 답답한 그녀와 하나가 되어 주면 그뿐이라는 말인데요. 산사의 가파른 길을 오르며 할머니의 마음은 이미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거기에 비교하거나 충고하게 된다면 할머니의 마음은 더욱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고 애써 평정을 되찾게 된 마음은 다시 요동치게 되어 버릴 되기 때문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도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다난했던 기해년도 이제 다 지나고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다가오는 경자년 새해도 모두 지극히 행복하시고 여일하시길 두 손 모아 봅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5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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