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과 터무니
풀꽃과 터무니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12.1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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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학교에 와서도 공부는 뒷전이고 집에 돌아갈 때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던 까까머리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지만, 달리 변한 게 없었습니다.

교실마다 그런 아이들은 꼭 있었고, 선생님들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채 골머리를 앓고 있었죠.

수업 중인 교실을 돌아보던 교장 선생님의 한숨도 깊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 집 생각으로 목이 길어진 아이들로만 모아진 교실에서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운동장으로 나가서 풀꽃을 그려라.”

5분도 되지 않아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의 손에 들려진 그림은 풀꽃이 아니었지요.

아이들이 별다른 소득도 없이 뛰다시피 교실로 되돌아오곤 했지만,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늘 똑같았습니다.

“풀꽃을 자세히 보아라. 그러면 더 그릴 수 있단다.”

아이들이 풀꽃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드디어 풀꽃다운 그림도 보이기 시작했지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썩거리던 아이들은 교실 공부에도 조금씩 적응을 했고, 교장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보다가 시까지 쓰게 됐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나태주 시인의 `풀꽃 1'이란 시가 세상으로 나오게 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기억나는 대로 옮겨본 겁니다.

살다 보니 갈수록 그 시가 더욱 살갑게 다가옵니다. 자세히 보지 않았더군요. 오래 보지 않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예뻐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기 짝이 없고 날이 잔뜩 서 있는 저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나태주 시인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생과 나눔, 업사이클링의 지역적 실천을 추구하고 있는 문화재생공동체 `터무니'의 이수경 대표도 그 중 한 사람일 겁니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나 일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고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터무니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더군요. 그런 `터무니'의 꿈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H.D.소로의 말처럼 “꿈은 우리가 가진 성격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니까요.

2012년에 `말하는 건축가(Talk ing Architect)'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건축가 정기용을 다룬 다큐멘터리 작품인데, 영화의 줄거리로 나온 자료에선 그에 대해 “건축의 사회적 양심과 공공성을 강조해왔다. 언제나 열정적인 말로써 한국의 건축 제도를 개선하고 대안적인 건축 철학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 지식인이다”라고 소개를 했었죠.

이미 고인이 된 정기용을 얼마 전에 EBS 프로그램 `건축탐구 집 시즌 2'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창, 나의 방, 나의 집'이란 주제를 살린 내용이었는데, “건축가는 근사한 형태의 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사람”이란 그의 터무니 있는 생각이 소외된 농촌 지역 주민들을 위한 노인요양원이란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감동의 역작이었습니다.

자세히 보고, 또한 오래 보기도 하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게 아닐는지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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