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
동백꽃 필 무렵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19.12.1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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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올망졸망 옥색의 꽃망울을 밀어올리고 있다. 어린아이를 안 듯 조심스레 들어 올려 창가 볕 좋은 곳에 자리를 만든다. 모룻돌을 만들어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해가 빛날수록 비릿한 어린 색의 봉오리들이 유혹한다.

오래전, 아버지는 첫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마당 장독대 옆에 동백나무를 심었다. 작은 묘목을 심었는데 잘 크지도 않고 꽃도 피우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을 숨 터와 싸우는가 싶더니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몸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꽃은 붉은 달처럼 타올랐다. 종국에는 아버지 키만큼 몸집을 키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잡아 온 생선 찌꺼기들을 나무 밑에 묻어주며 바다를 나누어 가졌다. 오빠는 수도꼭지의 호수를 열어 나무를 향해서 뿌려댔다. 반짝이는 햇살에 나무와 물비늘은 춤을 추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는 눈 속의 꽃이 유난히 빛났다. 하얀 얼굴을 가진 언니처럼 예뻤다. 툭툭 떨어져 내린 꽃잎으로 마당 한가운데 동그랗게 그림을 그리곤 했다. 동백나무는 가족이 되어갔다.

창창하던 동백나무는 아버지가 떠나자 키를 멈추었다. 친구이며 오빠의 그림 소재였던 꽃은 오빠의 그림이 사라지자 오빠를 찾아 떠났다. 작은 집을 등 뒤에 두고 파도 소리를 들려주던 그 바다도 손을 놓았다. 간척이라는 이름으로 새 옷을 입었다. 왁자지껄 놀이터였던 그곳은 인적이 끊긴 고요만이 쌓이고 울창한 대나무 소리가 바다를 대신한다. 혹여 누가 소문을 물어올세라 동백은 홀로 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가끔, 바람에 업혀 오는 바닷소리를 그리워하며 짠물을 접고 민물의 지느러미로 받아내고 있다.

올봄, 연분홍 꽃이 몽글몽글 매달린 동백나무가 내게로 왔다. 달콤한 향기를 통째로 가지고 왔다. 개량종이라 향기가 있어 수향이라 부른다. 분홍 꽃잎이 열리자 향기가 넘쳐났다. 향기는 사무실을 물들이고 나를 물들였다. 옛 추억에 빠지듯 흠뻑 빠졌다.

동백나무를 사무실 안으로 들이고 나서 나는 꿈을 꾼다. 수직의 밤이 찾아온 이 작은 공간이 축제의 장이 되길 꿈꾼다. 바람의 길이 달의 길로 만들어지고, 초승달이 온달이 될 때, 달은 동백을 찾아올 것이다. 어둠이 몸을 열고 생명이 섬이 되어, 뭍에서 섬으로 이어지면 곧 그곳에도 삶을 넘어서는 섬이 될 것이다. 그대가 외로워서가 아니라 내 기억이 외롭기에.

같은 생명체로 같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섬에 전해지면 혹 다시 꿈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 꿈을 향해 어릴 적 소금기가 남아있는 내 안의 짠 기운을 꺼내 꽃을 멈춘 동백나무 뿌리에 말랑한 소금이 되었으면 좋겠다. 딱딱하게 굳은 나무의 가슴이 말랑해졌으면 좋겠다. 가난한 집을 홀로 지키는 동백나무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아버지께 보냈을 것만 같다.

이승을 떠나서도 놓을 수 없는 마음, 그것은 후손에게 보내는 사랑이 아닐까, 아버지의 동백나무가 몹시도 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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