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낙원
산중낙원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9.12.0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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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만추. 풍경은 차갑지만 바닥까지 친절하게 내려온 햇빛은 거만하지 않게 발끝에 머문다. 들길을 걸어야겠다. 고샅길을 지나 산길을 따라 내려가며 앙상해진 빈 가지를 본다. 산자락 밑으로 내려온 낙엽이 세상의 빛깔과 뒤 섞이고 있다. 숲은 헐렁해지고 텅 빈 논과 밭은 쓸쓸하다.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붙잡다 놓치는 들길마저 고적하다. 이럴 땐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 게 제격이다. 대지를 꾹꾹 누르며 나아가면 사색은 깊어지고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돌아오면서 무를 수확하는 사과밭 아저씨를 만났다. 넓은 농지에 철 따라 종류가 다른 작물을 심어 판매하는 부지런한 분이다. 이분에게 나는 많은 걸 얻는다. 어느 날은 실한 가지나 잘 익은 토마토를 따서 주기도 하고 파를 출하하는 날이면 파도 넉넉하게 뽑아 준다. 어느 날은 운동하면 갈증 난다고 시원한 사과즙을 몇 봉지씩 주기도 한다. 아저씨의 밭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무와 배추 위로 마른 낙엽이 내려앉는 걸 보며 추위에 얼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아주머니 두 분과 무를 뽑고 있다. 이런 날은 다른 길이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일손이 모자라 절절매는데 운동한다고 두어 시간씩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좋기만 하겠는가. 그분은 나를 보자 무밭으로 불러들인다. 몇 개 가져가라고 하면서 한 무더기를 쌓아 놓는다. 며칠 전, 쌈으로 먹으라며 배추를 주신 아주머니도 일손을 돕고 계시다 나를 보자 정신없이 뽑아다 보탠다. 무김치도 담그고 남으면 무말랭이도 만들라 한다.

길옆 농막에서 배추를 다듬던 아주머니가 맛있는 배추라며 두 포기를 봉지에 담아주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해서 난감하기도 했지만 인정으로 주시는 걸 마다할 수도 없었다. 이른 봄부터 길옆에 붙은 논과 밭에서 살다시피 하는 분이니 어쩌다 만나면 상추나 풋고추를 손에 들려준다. 그럴 때마다 운동 중인 나는 민망하고 미안했다. 사과밭 아저씨도, 그 아주머니도 정답고 고마운 분이지만 비 오는 날 만났던 동네 아주머니 두 분께 받았던 감동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일기예보는 분명 흐리다고만 했었다. 병원 갈 일이 있었던 그날은 차를 두고 버스를 탔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자 비가 내렸다. 산속동네까지는 택시도 잘 가질 않아 버스를 탔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찬비를 맞으며 30여분을 걸어야 한다. 함께 내린 아주머니가 정류장 아래 두었던 전동차를 타고 내 곁에 멈춘다. 걷는 것보다는 빠를 거라고 자리를 좁혀 뒤에 태워가다 트럭을 운전하는 아주머니를 만나자 집에까지 데려다 주라고 부탁한다. 지명으로는 한동네 사람이나 그분들은 토박이고 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으로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 타인을 위해 당신들의 삶을 잠시 정지시킨다는 게 쉬운 일인가.

세상이 깊어진 가을 속으로 젖어든다. 고독해지고 허무해지는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가고 어느 사람은 떠날 것이다.

시간의 등성이에 서서 계절을 보내나 따스한 눈빛으로 돌아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묵방골을 산중낙원이라 했다는 마을 유래비의 글씨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나도 그분들처럼 선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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