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빗소리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9.11.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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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불갑산 품에 안긴 불갑사, 초겨울 비가 내리는 불갑사는 더없이 고졸하다. 절집의 기와지붕은 빗물 받침이 없어 기와 골골마다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어떤 연주자가 이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까. 만세루 툇마루에 앉아 듣는 빗소리, 규칙적인 단조로운 음에 묘한 끌림이 있다. 지루한 듯 지루하지 않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

만세루 지붕에서 마당으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서 그녀와 나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비 오는 날 교복을 입고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걸었다. 교복과 머리가 흠뻑 젖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렸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가식 없이 맑고 환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여고시절 단짝이었던 우리는 늘 붙어다녔다. 졸업을 하고 우리가 20살, 어느 날 그녀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는 한참을 방황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아이 둘을 낳고 큰애가 유치원 다닐 무렵 그녀가 찾아왔다. 머리를 깎고 재색 두루마기를 입은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내게 왔었다. 나는 구도자의 길을 가는 그녀가, 그녀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애들이 있는 내가 너무나 어색하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었다. 초겨울 산사에서 듣는 빗소리는 그녀가 읽는 경전처럼 숙연해진다. 어느 절집에서 정진하고 있을 그녀가 오늘 보고 싶다.

겨울로 접어든 불갑산이 흠뻑 젖어 있다. 한 번도 산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편안하게 머물렀던 적이 없다. 절집마당을 사박사박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조금은 쓸쓸하지만 따스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동동거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내게 주는 휴식 같은 시간이다. 호젓하게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다.

세심정이 있는 일광당 뒤 작은 마루가 아늑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저 한 방울의 빗물이 이 땅의 생명들을 키워낸다. 들판의 곡식, 산에 나무들, 물고기, 작은 들꽃까지 다 키워내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바다로 간다. 바다에서 또 다른 생명을 이어간다. 대웅전 지붕에서, 만세루 처마에서 떨어지는 각각의 빗물이 다 귀하게 쓰이듯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쓸모없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빗소리는 또 다른 음악으로, 귀한 말씀으로 마음을 달래준다. 낭만도 있고, 슬픔도 있고, 쓸쓸함도, 따뜻함, 감사한 마음.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지극한 진리의 말씀도 들리는듯하다. 나이를 먹으며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들꽃이 그러하고 가을 햇살, 걸어가는 노인의 굽은 뒷모습,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내게 아무 관심도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인생은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었다. 먼지만 풀풀 날렸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살아오느라 고생했다고 내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준다. 삭정이처럼 메마른 내 가슴, 불갑사 부처님 품에서 촉촉해진다.

어느 하루,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 좋겠다. 불갑사 만세루 툇마루에 앉아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핏대를 세웠던 일들이 무심해진다. 혼곤하게 자고 일어난 듯 몸과 마음이 평온해진다. 산사에서 자연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내 삶에 타박하기보다는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 나와 인연인 그들이 어디 있든 무슨 일을 하든지 결국 우리는 빗물처럼 흘러 흘러 바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누구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살아왔는가. 라는 물음을 빗소리에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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