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김치, 친김치
시김치, 친김치
  •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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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날씨가 추워지니 크산토필보다는 안토시아닌이 가득한 붉은색이 다정하게 다가온다. 붉은 단풍 아래 서면 세상이 환해지는 걸 보니 나 아직은 푸른 날인가 보다. 투명한 잎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좋아한다. 혹시 그늘진 구석이 있다면, 저 눈부신 단풍 빛으로 한 번쯤 붉게 물들어 말갛게 서 있고 싶다.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친정엄마가 눈치껏 일구어놓은 뙈기밭에서 시(媤) 자와 친(親)자의 허물 수 없는 경계가 고랑을 읽는다.

내 땅도 아닌 매봉산 자락,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며 심어놓은 채소들이 햇빛을 받으며 쑥쑥 자라고 있다. 손 빠르게 다녀간 어떤 뙈기는 추수를 끝내고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남의 땅에 농사짓는다고 자식들한테 잔소리 들을까 봐 조심스레 가꾼 엄마의 밭에도 배추와 무, 갓, 파가 제법 심겨 있다. 배추가 그다지 실하지는 않지만, 노란 속이 간간이 박혀 아주 맛있게 보인다. 많지 않아도 동생들이랑 올 김장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제일 먼저 찾아간 내게 마음껏 골라 따 가란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면 배추를 골라 땄다. 엄마는 무를 뽑으며 뿌리가 길지 않고 잔뿌리가 별로 없는 걸 보니 올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겠다며 지나가는 바람의 말을 내려놓는다.

자그마한 뙈기밭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시댁 배추밭의 푸른 잎이 때아닌 내게 다가와 고랑에서 너울거린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진다. 시댁과 친정이 가져다주는 경계는 배추까지도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한다. 시댁은 농사를 많이 지었다. 시부모님은 자식들 이상으로 농사에 정성을 쏟으셨다. 소목재에서 제일 농사를 잘 짓는 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배추 한 통이 아낙의 큰 엉덩이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컸다. 억척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어른은 재산의 욕심도 많았다. 주머니에 한 번 들어간 돈은 나올 줄 모르고 맏며느리에게 주는 곡식도 꼭 욕 한마디 하고 주셔서 농산물을 가지고 올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바다같이 출렁이는 배추밭에서 배추를 딸 때도 눈치를 봐야만 했다. 좋은 걸 따자니 한 소리 들을 것 같고, 부실한 걸 따자니 찜찜하고 하는 수없이 어정쩡한 놈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는 속앓이를 많이 했다.

오늘은 엄마의 밭에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자유를 누리던 어린 시절 가을을 만났다. 세상에 아무 걱정도 근심도 부러울 게 없었던 엄마의 품 같은 매봉산 자락이다. 재개발로 떠들썩한 나라 땅이지만, 단풍 바람과 햇살이 소복이 내려앉은 뙈기밭이 오늘만큼은 최고의 낙원이다.

시댁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작은가보다. 하루하루 지내온 시댁 식구들과의 시간은 길었지만, 억하다가 보니 수십 년이 지났다. 푸르게 출렁거리던 배추밭도, 붉게 물들었던 고추밭도 지금은 묵정밭이 되어 있다. 지독하게 농사지어 돈 모아 제대로 한 푼 써 보지도 못하고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보면 측은지심을 느낀다. 시대와 자라난 환경에 따라 성격이나 생각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세월이 변해도 시(媤)자는 내게 있어 아직 불가근불가원의 거리이다.

마음껏 뛰어다니며 골라 따온 배추와 엄마가 빻아준 고춧가루로 김장을 하면서 친정 동생들을 다 불렀다. 수육을 삶으며 혼자 김장 준비를 하고 있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갖은 양념으로 음식 맛을 내도 마음의 양념은 따로 있나 보다. 시공간을 초월한 칼칼한 올가을 친김치 맛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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