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각수
압각수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19.11.1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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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오늘도 장이 열렸다. 삼삼오오 주거니 받거니 표정이 밝다. 젊음을 떠나온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는 금시에 맵시 나는 신사가 되고 매력적인 숙녀가 된다. 이곳 어딘가에 젊어지는 묘약이 있는 듯하다.

청주 중앙공원은 어르신들의 놀이터이자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고 소식을 주고받는 매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값나가는 비싼 소식을 들고 오기도 하고 안고 온 상처에 치유의 연고를 바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외로움이라는 질긴 병을 서로가 조금씩 나누어 갖는다. 장이 파하고 돌아갈 즈음 그들의 표정은 마술처럼 활짝 열려 있다.

공원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900년 된 은행나무이며 뿌리가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은행나무는 청주를 대표하는 노거수다. 은행나무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말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목은 이색 등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마침 홍수가 나서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하였고, 이는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풀어주었다는 일화다.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온 나무지만 세월의 무게에 군데군데 수술을 받았다. 몸 일부분을 잃었지만, 상처를 딛고 여전히 청청하게 서 있다. 딱딱하게 굳은 뿌리는 뽀송뽀송한 흙으로 덮여 있고 나무를 빙 둘러싼 보철물은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다. 청주시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수천 개의 은행이 놀란 스컹크의 얼굴로 엎드려 있고, 비둘기의 애정행각은 고약한 냄새에도 아랑곳없다. 장터에 합류하지 못한 어르신이 벤치에 걸터앉아 오후의 햇살에 타박타박 졸고 있다. 좌우 걸음걸이가 비대칭인 신사분이 압각수를 돌며 나무와 눈을 맞춘다. 미리 약속이라도 있었는지 나무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연인처럼 다정하다. 나는 가만가만 그분의 뒤를 따르며 혹여 방해될까 내 그림자와 나를 분리한다.

압각수는 어떤 사람에게는 호기심으로, 간절함으로, 든든한 백으로 공원을 지키고 있다. 무심천을 끼고 청주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으로 시민들의 마음은 안정된다. 특히, 시간이 느린 노인에게는 친구이자 신과 가까워지는 통로이다. 수십 번의 계절이 오가고, 계절은 또 다른 가족을 이루는 동안, 그들의 나이만큼 바닥에 쌓인 골 깊은 사연이 압각수를 올려다본다.

마음이 가난한 자식을 바라보듯 말없이 내려다보는 900년의 은행잎이 반짝 빛을 내며 떨어진다. 노랗게 물든 노년의 얼굴이 압각수 안으로 저물어간다. 나는 이방인처럼 그 아름다운 풍경을 멀뚱하게 바라본다. 잠깐 이상의 세계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가장 따뜻한 색이 노년의 색이라면 신의 색은 오래된 나무의 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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