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 타작하는 날
들깨 타작하는 날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19.10.24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깨가 쏟아진다. 청명한 가을 햇살 아래 허공을 가른 도리깨가 휙휙,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작마당을 두드리면 메아리처럼 와르르 깨 쏟아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들깨의 고소한 향이 널리 퍼져 하늘을 나르던 새들도 배회하며 눈요기를 하고 지나간다.

농사일은 특히 때맞춰 해야 한다. 베어놓은 들깨를 제때에 털지 않으면 저절로 알갱이는 떨어져 수확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남편은 농작물을 심어놓고 하는 일이 바쁜 철이라 들깨 타작은 뒷전이라 야속했다. 나 또한 농사일에 경험이 적은지라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난감해하다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 일이 많아 야근했다며 처음엔 내키지 않아 하던 아들이 며느리와 일손을 돕겠다고 밭으로 온 터이다.

며칠 전 베어서 잘 마르도록 널어놓았던 들깨를 가빠위에 옮겨 가지런히 뉘어놓고 도리깨로 사정없이 두드린다. 농사일도 몸에 익어야 능률도 뒤따라 오르지 않던가. 어려서 구경만 했던 도리깨질은 처음엔 헛돌고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차츰 힘도 들어가고 나아졌다. 오늘 처음 도리깨를 잡아본 아들과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자 이젠 힘겨움 마저 잊고 제법 도리깨질 삼매경에 빠진듯하다. 시어머니께서는 농사일을 평생 해 오신지라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어설픈 우리 가족들 들깨 털기를 진두지휘 하신다.

들깨를 털다 보니 고향집 타작마당이 생각난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맘때면 우리는 소꿉놀이하고, 아버지는 긴 바지랑대가 빨랫줄을 떠받치고 있던 바깥마당을 곱게 단장하셨다. 자잘한 돌이라도 있을세라 깨끗이 쓸고 고운 황토 흙을 물에 섞어 움푹하게 패이거나 볼록한 곳이 없도록 골고루 다듬고 흙으로 마당 바르기를 하셨다.

흙으로 단장하자 타작마당으로 변했다.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에는 마당에 깔만한 도구도 변변치 못했다. 마당 가에는 낡은 가마니들을 울타리처럼 둘러치고, 발로 밟아서 돌리는 탈곡기로 여름엔 보리, 가을에는 벼를 털었다. 타작마당에는 도리깨소리가 빠질 수 없었다. 들깨나 콩, 팥, 수수 같은 잡곡들은 도리깨질해서 털었다. 마당 가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머릿수건을 쓰시고 농작물을 체로 치고, 키질로 까불러 쭉정이나 이물질을 걸러내어 알곡을 거두시던 모습들이 어제 일처럼 아슴아슴 지나간다.

차르륵 차르륵, 키질 소리가 마음을 적신다. 눈앞에서는 시어머니께서 우리가 털어놓은 들깨를 키질하고 계신다. 이물질과 들깨를 가르는 작업으로 키 바닥에 담은 곡식을 높이 올려 바람을 이용해 먼지나 검불을 날려버린다. 옆으로 흔들고 아래위로 슬렁슬렁 흔들어 알곡은 밑으로 모이게 하고 키 위쪽에 있는 쭉정이나 다른 이물질은 털어내 버린다. `언제 저 많은 들깨를 깨끗하게 알곡만 모을까'싶어 조급증이 났다. 성급한 맘에 키질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잡아봤지만 언감생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키질은 도저히 안 되고 어레미로 들깨를 쳐보았다. 성근 구멍으로 들깨알갱이는 빠져나오고 검불이나 마른 잎사귀들은 가려졌다.

시나브로 체질이 익숙해진다. 한참을 하다 보니 조급한 마음도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곡식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바람에 날리고 체로 처서 온갖 잡다한 마음은 없애버리고 알곡 같은 좋은 마음만 간직했으면 싶다. 이 가을 가슴 언저리에도 성근 체 하나쯤 걸어둬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