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회갑과 효도관광
아내의 회갑과 효도관광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9.10.09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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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아들 며느리 덕분에 한동안 호사를 누렸습니다. 꼭 한 번 가보리라 벼르고 있었던 동유럽 4개국(독일·체코·오스트리아·헝가리)과 발칸 3개국(크로아티아·세르비아·슬로베니아)을 관광하고 왔거든요.
지네 엄마 회갑이라고 적잖은 돈을 들여 이른바 효도관광을 시켜준 건데요. 그런 아들 내외가 대견하고 흐뭇해 선뜻 길을 나섰지만 해외관광은커녕 제주도관광도 못해보고 일찍 세상을 등진 부모님이 눈에 밟혀 속울음을 삼켜야 했습니다.
모처럼 자식 키운 보람을 만끽하며 망중한을 즐기는 아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죠.
아내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거든요.
찢어지게 가난한 7남매 장남에게 그것도 놀기 좋아하고 허세도 곧잘 부리는 실속 없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아버지를 여읜 어린 시동생들과 두 아들 건사하며 쓰러져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안해(집안의 태양)였으니 상찬 받을 만하지요. 40여 년간 공직생활을 하며 지아비의 아내로, 두 아들의 엄마로, 집안의 맏며느리로 기능하며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입증하니까요.
해서 이번 여행은 그녀의 전속사진기사 겸 수행비서로 기능하리라 마음먹었죠. 사진 찍기를 좋아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몸은 환갑을 넘긴 초로의 할머니가 분명한데 마음은 아직도 순박한 소녀였습니다.
장시간 비행기 탑승은 물론 날마다 먼 거리를 관광버스로 이동하며 짐을 풀었다 묶었다 를 반복하는 고된 여정이어서 힘들 법도 한데 교과서나 매스컴으로 봤던 알프스산맥 동쪽과 아드리아해변에 위치한 나라들의 고색창연한 도시들과 아름다운 산과 강과 호수를 대할 때마다 감동과 감탄을 연발하는 수학여행 온 여고생 같았거든요.
그러나 여행 중에 슬며시 바라본 모습과 잡아본 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녀린 몸매와 긴 머리카락은 간데없고 펑퍼짐한 몸뚱이와 가발을 써야 할 정도로 정수리 부위가 훤히 비취는 짧은 머리카락과 아기단풍잎처럼 작고 보드라운 손은 퉁퉁 부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게 모두 맨주먹 붉은 피로 살아온 삶의 과부하 때문이라고, 일탈과 위선에 물든 철부지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래요. 세상 아내들은, 세상 엄마들은 무죄입니다. 아니 참으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 아내들의, 그 엄마들의 회갑은 기념되어야 하고 축하받아야 마땅합니다.
장수시대라 칠순 팔순도 널브러져 있는데 회갑이 무슨 대수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나무 옹이 지듯 질풍노도처럼 살아온 지난 삶과 훈풍순도처럼 살아갈 미래 삶의 변곡점으로서 회갑의 의미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니까요.
효도관광. 진부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이 역시 의미 있는 효도이고 관광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이자 문화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늦게 해 자식을 늦게 둔 이들과 숫제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겠죠.
효도란 단어를 국어사전을 들춰보거나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알 수 있는 고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킨 자신을 위해 효도해야 합니다. 자가효도관광이라 해도 좋고 실버관광이라 해도 좋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깃발 따라 인증사진이나 찍고 휑하니 지나가는 패키지 관광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곳에서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물렀다가 제2 제3의 명소로 이동하는 힐링과 치유의 관광여행이 바로 그것입니다. 절친 부부들과 함께하면 금상첨화죠.
각설하고 좋은 여행과 관광은 결코 소비와 낭비가 아닙니다. 아니 자신을 위해 쓰는데 소비면 어떻고 낭비면 또 어떻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니 지친 몸을 위무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남편들이여 머뭇거리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떠나세요. 안해를 모시고 그녀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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