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선비의 미학, 청주 지선정(止善亭)
은둔 선비의 미학, 청주 지선정(止善亭)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08.1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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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청주 남쪽 끝에서 금강을 경계로 대전과 접하고 있는 지역이 현도면(賢都面)이다. 조선시대 문의현 일도면과 이도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현재의 지명은 1914년경 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생겼는데, 지금의 구봉산(九峰山)ㆍ구룡산(九龍山)의 옛 이름을 현도산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금강변에 있는 현도면 일대는 토지가 비옥하고 금강의 가항종점인 부강포구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물자수급이 쉬워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현도면에 보성오씨, 순흥안씨, 진주류씨의 3성이 집성촌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보성오씨는 우리 지역에서 현도오씨라 불릴 정도로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의 보성 오씨 입향조는 오숙동(吳叔仝)이다. 조선 태종 말엽에 해안지역에서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자 이를 피하여 보성에서 신탄진을 거쳐 오늘날의 현도면 양지리 월대촌으로 들어왔다. 그는 양지리에 살고 있는 원계종(元繼宗)의 집에 의지하였고, 이후 원계종의 사위가 되어 청주에 정착하였다. 이후 보성오씨는 현도에 뿌리를 두고 각 지역으로 파급되어 여러 분파를 형성하며 토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지선정은 청주시 현도면 중척리 강정(江亭)마을 뒷산에 동향하여 있다. 강정마을은 중척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름도 `강가에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선정(止善亭)'에서 유래한다. 정자 주위에는 느티나무 노거수를 비롯하여 숲이 어우러져 있으며, 앞으로는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넓은 농경지가 펼쳐지다가 금강과 맞닿는다. 본래 조용한 곳이었으나 고속전철이 생기는 바람에 시끄러워져서 다소 운치가 줄었으나 금강을 끼고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을에는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다.

지선정은 광해군 2년(1610)에 지선(止善) 오명립(吳名立, 1563~1633)이 세운 정자이다. 그는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으로 태학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나 당시 조정은 대북파가 득세하여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와 지선정을 짓고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북창(北窓) 정렴을 흠모하여 노봉서원(峰書院)을 창건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향촌을 교화시켰다. 후에 현도면 중척리에 있는 강고사(江皐祠)에 배향되었다.

옛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과거공부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도 했지만, 학문의 본질이 과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즉시 초야로 돌아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자신의 완성과 후진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였다. 지선정(止善亭)은 바로 그가 일생동안 학문과 수양을 하면서, 한 지역사회의 사표역할을 한 본거지였다.

지선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남쪽 2칸은 우물마루로 꾸미고, 북쪽 전면 1칸은 문으로 막아 마루방을 만들고 후면 1칸은 단이 높은 마루로 구성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79년 중건하고 1932년에 보수한 것이다.

지선정(止善亭)은 풍류 관망 기능과는 달리 독서와 휴식을 겸한 강학의 성격을 띤 별서건축이다. 현재 정자안의 대들보와 서까래 주변에 여러 인사들의 시문 현판이 잔뜩 걸려 있어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우암 송시열이 오명립 선생에게 준 `충효일생 와차강분(忠孝一生 臥之江濱)'이란 편액은 `일생을 벼슬을 마다하고 충과 효에 매진하며 강가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란 뜻으로 정자 주인의 성품과 지향하는 바를 담고 있는 명문(名文)이다.

지선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과 주변의 넓은 평야는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고 온화하게 만들어 주는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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