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집
도장집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07.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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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인감도장을 찾았다. 플라스틱 둥근 막대 모양 안에 작은 소라껍데기와 수초 몇 가닥이 들어 있는 뿔도장이다. 서랍이며 수납 상자들, 가지고 있는 모든 가방 속을 하나하나 샅샅이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오랜만에 들고 나선 남색 손가방 안쪽 지퍼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자주 들고 다녔던 가방이라 그 당시 분명히 몇 번이고 꼼꼼히 찾아봤을 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랄 밖에.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해서 그 참에 인감을 서명으로 바꿔버렸었다.

어쨌든 다시 찾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중학교 입학할 때 아버지가 선물해 준 생애 첫 도장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물려 쓰는 일이 다반사인데, 절대 같이 쓸 수 없는 나만의 소유물이 생긴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모양까지 특별하고 예쁜 뿔도장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학교에서 통장을 만들 때, 친구들은 대부분 타원형의 평범한 나무 도장을 가지고 왔는데 내 손엔 아주 동그랗고 바닷속같이 신비로운 뿔도장이 있었다. 우쭐해진 기분에,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께 꼭 보답하리라 혼자 비장했던 기억이 난다.

얼른 도장집을 마련했다. 가죽으로 된 물고기 모양의 도장집이다. 배에 지퍼가 달려서 도장을 넣고 꺼내기가 손쉽게 되어 있다. 옛날 사람들은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나쁜 것을 경계하며 귀한 것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물고기 그림을 다락이나 벽장문에 붙여두거나, 뒤주의 자물쇠를 붕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의미를 생각하니 도장집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리라.

하나밖에 없는 딸이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며 당당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는 뿔도장을 골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장 찍을 일에 있어 늘 자신 있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결혼한 후에도 중요한 서류는 물론이고, 소소하게는 아이들 성적표나 가정통신문 확인란에조차 뿔도장으로 해결해왔다.

“걱정 마, 내가 이제 이겨낼 거야.”

작년 가을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아버지는 굳은 의지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 이겨낼 거라는 그 말을 믿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하는 분이니까. 비록 투병 생활 반년 만에 먼 길을 떠나가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날은 앞마당에 댕강나무꽃이 한창이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바람으로 가득 찬 하늘이 유난히도 파랗고 맑은 날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뵈는 선산에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머리 위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높이 날며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태몽처럼 또렷하게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남의 일인 듯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사십구재 무렵, 도장을 찾고부터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하늘만 파래도, 날이 하도 맑아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생전에 못 해 드린 것만 떠오르고 자꾸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지낼 순 없었다. 인제 그만 엄마한테 더 잘하는 것으로 속죄를 하자 다짐하며, 가슴 속에다 아버지를 위한 마음 집을 만들기로 했다.

바람이 불어오면 가끔 도장집에서 뿔도장을 꺼내 외로 새겨진 글자를 확인해본다. 편히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 석 자가 여전히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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