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한 드러내기 주의자들
도래한 드러내기 주의자들
  •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0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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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생명이 있는 것들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저만의 방법으로 표현한다. 씨앗이 눈을 뜰 때, 대지는 공간을 슬쩍 내어주고, 새싹이 눈을 뜰 때, 나무는 허공을 열어준다. 인간이 눈을 뜰 때, “응애”하는 경종에 세상은 무한의 자리를 내어준다. 무한으로 열어놓은 세상이 탁해질까 봐 자연은 날마다 오방색으로 재주를 부리며 신비로운 세계를 펼쳐놓는다.

조각 지식과 욕망의 시대, 고요 속으로 거칠게 들어대는 인간은 각자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성정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인간 시장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의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남들이 연출하는 세상 이야기를 나는 읽어나가기도 바쁘다. 신본주의도 인본주의에 밀린 지 오래되었고, 인본주의도 물본주의 밀려 개인주의를 출연하더니 어느새 이기주의가 막무가내 드러내기주의를 등장시켰다.

해서인지 요즘은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 등 SNS로 자기 존재성 드러내기가 한창이다. 아무리 민주주의 시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는 하나, 지나친 상대 비방이나 욕설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특히 정치가들을 얘기할 때 본인이 지지하는 당이 아닐 경우 상대방에 대해 폭언을 사정없이 퍼부어대는 글은 오히려 반감을 일으킨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심을 버리고 공적인 마음이 커야 신뢰성을 얻는다. 공적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약간의 갈등이 있을지 모르나 후에 잡음이 적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늘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므로 갈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본인의 뜻과 다르다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드러내기식 발설 또한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지켜보며 한숨 돌려보는 것도 선진문화시민으로 성장해가는 멋일지 모른다.

변화는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된다. 드러내기 방식도 참 다양하다. 그 움직임은 사심을 버리고 공심으로 향할 때 참되게 빛난다. 간혹 존재성 없이 부실한 바람에 휩쓸려 똥파리처럼 윙윙거리며 오염시키는 드러내기 주의자들을 보면 누가 강력살충제라도 뿌렸으면 좋겠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저울질하며 갈등을 불러 드러내기 한 세상은 오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아주 불편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각박한 시대일수록 인문학적 사고가 이 사회에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문학 전공자로서 현시대를 바라볼 때 인문학적 사고가 소외된 느낌이 들어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즘은 문화예술과 관련된 행사에 모니터링 하러 전국을 다닌다. 지역마다 그 나름의 문화적 가치와 특색이 있다. 지역이 가지는 문화적 특징과 행사의 취지와 목적, 기획자나 진행자의 마음가짐, 관객 등에 특히 관심을 가진다. 다니다가 보면 느끼는 바가 크다. 간혹 행사의 취지나 목적과는 달리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눈에 보인다. 기존에 존재하지도 않던 문화나 역사를 타지역처럼 흉내 내기 하다가 보면 행사가 초라해질 뿐만 아니라 아주 졸해 보인다.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정신과 사상이 배제되면 이 사회는 건강해질 수가 없다. 인간애가 점점 소원해져 가는 시대, 인문학적 사고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인간 상실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생존의 본능은 위대해서 각자 살기 위해 발부림 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 시대라고 하지만 막가파로 드러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아픔을 주거나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공짜가 없다. 선이든 악이든 내가 한 만큼 사필귀정으로 움직인다. 신도 지켜만 보고 있지 말리지 않는다.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네게 맡긴다”다. 인간미가 가미된 글에 꽃바람이 일어 “좋아요”로 답례하고 세상을 읽으러 오늘도 외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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