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시간
주머니 시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07.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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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언제나 바쁜 사람이다. 어느 날에는 핸드폰을 집에 놓고 가기도 하고, 일을 한 다음 기록을 해야 하는 볼펜을 빠뜨리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유난히 남편의 전화가 다급한 날이 있다. 티셔츠에 있던 메모지를 빠뜨린 날이다. 요즘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핸드폰으로 자신의 일정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남편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방식을 고집한다. 남편의 티셔츠에는 언제나 메모지가 가득하다. 하루하루의 일을 기록하고 한 달 단위로 군청에 보고해야 하는 남편의 일은 기록이 필수다.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경우 보고가 누락이 되어 농가에서는 보상을 받지 못해 막대한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 옷을 살 때 제일 큰 기준은 주머니가 있느냐 없느냐다. 티셔츠 위에 주머니가 달리지 않은 옷은 남편의 편에서는 쓸모가 없는 옷이다. 남편은 소 인공수정사다. 지금은 농가의 소들이 예전처럼 많지 않아 당연히 일도 줄었지만 집집마다 소들이 있던 삼십여 년 전만 해도 하루에도 삼십 여건이 넘게 수정 일을 가곤 했다. 그래서 남편의 티셔츠에 달린 주머니에는 항상 손바닥 반절만도 못한 메모지가 있다. 그런데 그 반절만도 못한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남편이 수정 일을 하고 난 후 적어 놓은 그 집의 소에 대한 기록장이다. 수정한 날짜, 수정한 그 소와 수정액의 일련번호 등을 적어 놓았는데 그 작은 메모장에는 며칠 치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메모장이 한두 장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메모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주머니의 공간도 세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주머니가 불룩하게 메모지를 넣고 다녔는데, 요즘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농가의 소들도 그 수가 줄었다는 뜻이다. 하기야 예전에 소들이 하던 농사일을 요즘은 기계가 모두 하고 있으니 더 이상 소들은 일꾼이 아니다. 때문에 고기소로 되어버린 탓에 농가에서는 사료 값이며, 소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대신 큰 농장에서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다.

가끔 남편은 예전의 그때가 그립다고 했다.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 길을 걷노라면 소똥이 군데군데 있어 피해 다니느라 폴짝 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 길에서는 가끔 농부들과 소들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남편의 차가 시골 마을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소 신랑이다.”하고 외치며 따라다니곤 했다. 그래도 남편은 그 소리가 반갑고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시골 마을에는 소도 아이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발달이라는 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잃음이 담겨 있다. 기술의 발달은 편리함과 신속함 정확성을 가져 왔지만 그로 인해 소중함에 대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시간의 소중함, 생명의 소중함, 관계의 소중함, 노동력의 소중함 등등.

`주머니 시간', 이 말은 남편의 주머니 속의 메모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편은 언제나 주머니 속의 메모지를 `주머니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과 나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알아들으니 그것이 더 용하다. `주머니 시간',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주머니 속의 시간이라니. 하지만, 이 말에는 소중함이 배어 있다.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메모지 한 장, 그것은 사소한 약속의 시간과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소중한 시간이 되어 주머니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리라. 우리가 그동안 잊은 많은 소중함의 시간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중요한 시간은 아닐까. `주머니 시간'나도 꼭 하나 만들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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