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청하콘
만원의 행복, 청하콘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06.2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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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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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넷째 주 목요일이면 지갑에 만원을 넣고 발길을 옮기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 두 달의 경험만이라도 얼른 꺼내놓고 싶군요.

4월 25일에는 커뮤니티 플랫폼(community platform) 동부창고 34동에서 청주하우스콘서트(이하 청하콘)가 마련한 피아노와 첼로의 듀오를 만났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가서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미루고 있던 손톱을 깎는 거였지요. 피아노를 치는 아비람 라이케르트도, 첼로를 켜는 송영훈도 손톱이 길진 않았기에 말입니다. 손톱 하나도 마음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그들의 단념에 대해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상에서의 엄청난 절제가 밑받침되지 않고선 객석을 마주하기가 힘들었을 거란 생각을 했지요.

연주에 빠져들면서는 그날 하루 전에 보았던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다루었던 `시간 강탈'이란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아비람과 송영훈의 콜라보를 통해 전해지는 슈만과 쇼스타코비치와 파가니니의 작품들은 이미 시간 강탈의 세계였거든요. 그들을 통해 작곡가들의 낭만과 우정과 고뇌에 찼던 과거의 눈부셨던 시간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가면서 송영훈의 얼굴이 달라진 겁니다. 얼굴이 작아진 겁니다. 슈만과 쇼스타코비치와 파가니니를 격렬하게 끌어안다 보니, 얼마나 진액이 빠져나갔을까요. 아비람의 얼굴도 처음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고양된 감정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청하콘이 준 행복은 미시적이면서도 섬세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무대와의 거리가 10미터를 벗어나진 않았으니까요. 연주자들의 눈빛과 호흡, 때론 근육의 움직임까지도 통째로 관객의 시야에 들어왔거든요. 아비람과 송영훈의 협연은 청하콘의 방명록에 망설이지 않고 `행복'이란 말을 꾹 눌러 쓰게 만들었습니다.

5월 23일에 다시 찾아간 만원의 행복은 정말 `아름다운 5월에'다가 `나는 꿈속에서 울었네'였습니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48)'을 부른 바리톤 안민수가 내놓은 연주가 시작할 때의 저는 `시인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디히터(dichter)'로서 객석에 있었지만, 연주가 끝났을 때의 저는 `시인이나 가객(歌客)'으로서의 `디히터(dichter)'로 변화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예기치 않던 화학적인 변화를 체험했던 겁니다. 어설픈 제게서 시심(詩心)이 막 분출되고 있었으니까요.

해설을 맡았던 나성인의 말처럼, “시는 곧 노래”였습니다. 13곡 `나는 꿈속에서 울었네'는 앙코르로 불렀던 `마중(허림 시, 윤학준 곡)'과 연결되어서 사랑이 곧 간절한 꿈이요, 기다리는 마중이요, 녹아내리는 마음이요, 멈출 수 없는 눈물이란 것을 절감케 했습니다.

11곡 `한 총각이 한 처녀를 사랑했으나'를 부르기 전에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안민수를 보면서, 1곡에서 10곡까지 그가 입으로 고백했던 수많은 꽃을 다시 호명해 보았습니다. 사랑의 꽃, 향기로운 꽃, 장미, 백합, 예쁜 꽃…그렇다고 해서 꽃의 이름만을 불러내진 않았습니다. 고백과 한숨과 번뇌와 고통과 울음과 전율과 미로와 상실과 어둠과 상처와 비탄과 슬픔과 위로와 번민과 춤과 신음과 아픔 같은 것들도 불렀으니까요.

바리톤 안민수와 피아니스트 신미정의 대화로 옮겨진 `시인의 사랑'을 통해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최고의 경전(經典)은 사랑이다!” 또한 새로운 목표를 갖게 만드는 청하콘이라서 더욱 고맙기도 했지요. `시인의 사랑'이 더 많이 듣고 싶어졌고, `마중'이란 노래를 배워서 어디서든 불러보고 싶어졌거든요.

아무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서울엔 `풍월당(風月堂)'이 있고, 청주엔 청하콘이 있다고 말이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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