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꿈
장미의 꿈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6.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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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벚꽃이 온통 환한 불을 밝히던 4월. 거기에 미쳐 구름떼처럼 몰려들던 사람들에게 환상으로 남아있는 기억 위로 5월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이에 질세라 장미를 내세운다. 어떤 꽃도 이와 대적할 수가 없다. 항복이다. 장미는 과히 독보적이다. 어느 꽃이 감히 여왕의 자리를 탐할 수 있을까.

붉은 장미가 천지에 불꽃놀이를 한다. 여기저기서 팡팡 터뜨리는 꽃불을 보고 지르는 탄성으로 시끄럽다. 곧게 가지를 뻗어 피는 유순한 장미는 그나마 조용하다. 자신의 자태를 더 도드라져 보이려는 덩굴장미다. 늘어뜨린 덩굴마다 꽃송이가 흐드러져 화려하다 못해 넋을 잃을 정도다.

뜰 안에 고이 심은 덩굴장미는 너도나도 월담을 시작한다. 뿌리는 안채에 박고 받침대에 기대어 덩굴을 뻗어 간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감탄사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꽃들이 철망을 넘어 길가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월담은 아름다우므로 무죄다.

휘감고 올라가는 덩굴이 아니라 담장을 간신히 타고 오른다. 앞장을 선 꽃을 이어 오르르한 꽃송이들이 무리지어 뒤를 따른다. 일개 군단이다. 드디어 안간힘을 하느라 끓어오른 열을 일제히 뿜어댄다. 붉디붉은 농염한 미소를 밖을 향하여 보내고 있다. 어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으랴.

장미의 꽃말은 열정적인 사랑이다. 다른 의미로는 밀회의 비밀도 갖고 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랑의 신(神)인 쥬피터가 어머니인 비너스의 로맨스를 알게 되었다. 비밀을 누설치 말아 달라고 침묵의 신인 헤포그라데스에게 부탁하였는데 지켜주겠다는 응답으로 장미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 후 비밀을 지켜주는 꽃이 되었다.

산책을 하며 지나는 길가에 회색 담장을 넘을 듯이 새빨간 장미가 까치발로 내다보고 있다. 그냥 외면하고 지나가지지가 않는다. 온전히 시선을 빼앗긴 채 홀딱 홀린다. 눈물 나게 고혹적이다. 여자로서 저토록 붉게 타오를 수 있는 정열이, 월담을 과감히 결정한 용기가, 행하는 도전이, 그리하여 자신을 많은 사람에게 내보이는 당당함이 부럽기만 하다.

담장 안을 들여다보니 정원에는 또 다른 장미도 심겨져 있다. 곧추세운 나무에 꽃들이 피어 있다. 화려한 꽃임에도 같은 이름의 덩굴장미에는 주눅이 들어 보인다.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덩굴을 아마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꽃은 장미다. 꽃으로 말한다면 지금의 내 성격으로 보아 뜰 안에 피어있는 장미다. 뛰쳐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장미처럼 의기소침한 내성적인 내가 싫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말문이 먼저 막히고 남들에게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이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했다.

꽃으로 다음 생을 기약한다면 정원이 잘 가꾸어진 어느 집의 담장에 심겨진 덩굴장미로 피어나고 싶다. 겁이 많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돌아가고 뒤돌아오던 길이다. 집안의 풍경에 만족하며 안으로만 밖을 궁금해하지 않고 덩굴을 뻗어 벽을 넘으리라. 몸에 세운 가시로 나를 방어하리라. 천군만마의 꽃송이들을 이끌고 당당하리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랴. 벽을 힘겹게 올라 곧바로 피를 토해내듯 꽃잎을 여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덩굴장미도 알고 있는 것일까. 온 정열을 쏟아내고 있다. 행여 집주인이 장미에 홀린 문밖의 여자와 눈이 맞아도 그건 비밀이다. 장밋빛 로맨스를 꿈꾸는 5월은 비밀스런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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