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죽음
안전한 죽음
  •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9.06.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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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세상일이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위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 찾아온다. 위기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위기가 와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안전고장(fail safe)기술이다. 고장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고장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다. 고장이 나더라도 안전하게 고장이 나도록 하는 기술, 이것이 바로 안전고장 기술이다.

네거리의 교통신호가 고장이 났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모든 신호등에 녹색불이 들어온 상태로 고장이 나는 것이 좋을까,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로 고장이 나는 것이 좋을까? 둘 다 나쁘다. 그런데 일단 고장이 난다고 보고 어떤 고장이 좀 덜 나쁘냐 하는 것이다. 모든 신호등이 녹색이라면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가 네거리를 향해서 그냥 달릴 것이 아닌가?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하지만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로 고장이 나면 교통 혼란은 일어나겠지만 대형 충돌사고는 방지할 수 있다. 이처럼 고장이 나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하는 기술이 바로 안전고장 기술이다.

안전고장 기술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가장 비근한 예는 화재가 났을 때 스프링클러나 방화벽이 자동으로 작동되도록 하는 기술이다. 화재는 나지 않아야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차선책은 화재가 나더라도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자동차의 에어백도 안전고장 기술의 한 예다. 자동차 사고는 나지 않아야 하지만 사고를 완벽하게 막을 방법은 없다. 에어백을 통해서 목숨만은 건져보자는 것이다. 가정에 있는 누전차단기도 이러한 기술의 예다. 전기 누전은 화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누전이 일어나면 전원이 자동으로 차단되게 하는 장치가 바로 누전차단기다. 전기가 자주 끊기는 것이 귀찮아서 이 누전차단장치가 작동되지 않도록 해 버리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래서 사고가 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고 피해가 나더라도 가급적 치명적인 피해는 피해보자는 것이 안전고장 기술의 기본 정신이다. 그런데 이 기술의 정신은 공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회사 운영이나 사회나 국가 시스템에도 적용될 수 있고, 한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매우 큰 사고들을 경험했다. 대연각 화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수많은 사고를 경험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안전고장 장치가 없거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지금까지는 성장이 가장 중요했지만 앞으로는 안전한 성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고,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일 가능성이 큰 것이 지금의 사회 구조다. 따라서 위기관리가 성장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 국가지도자는 성장주도형 인물이 아니라 위기관리형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안전고장 개념을 인생에 적용해 보았다. 재산을 잃는 것은 작게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살아가면서 건강을 잃는 것이 가장 큰 고장일 것이다. 그래도 건강을 잃지 않은 사람은 없고 그래서 사람은 다 죽는다. 죽음이 아마도 인간의 마지막 고장일 것이다. 그러면 죽음에도 안전한 죽음이 있을까? 안전한 죽음이라니? 죽으면 끝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지만 같은 죽음이지만 죽은 후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죽는 죽음도 있고, 문상객도, 영정을 지키는 처자식도 없이 고독하게 가는 죽음도 있고, 장례식장이 온통 싸움판이 되는 죽음도 있다. 재벌 총수가 죽고 나면 예외 없이 형제의 난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안전한 죽음 기술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죽음이 깨끗하고 죽은 후에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죽음, 남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는 죽음 이런 죽음이 안전한 죽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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