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에 있는 조선 첫 영의정 배극렴 묘소에서
증평에 있는 조선 첫 영의정 배극렴 묘소에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6.1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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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괴산읍에서 음성으로 가는 중간 즈음에 괴산군 부처의 정수리라는 뜻의 불정면이 있다. 이곳에 삼방리(三訪里) 마을과 어래산(御來山)이 있다. `삼방(三訪)'이라면 세 번 방문했다는 뜻이고, `어래(御來)'라는 것은 임금님이 오셨다는 뜻인데, 어떤 연유로 이런 지명이 생긴 것일까?

이 지명 유래는 모두 배극렴과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에서 생긴 지명이다.

배극렴과 이성계는 오랜 친구이며 혁명 동지였다. 그런데 옛 친구이자 신하인 배극렴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이곳에 머무르다 죽었다는 것이다.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개국 공신인 배극렴이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배극렴을 3번이나 찾아왔다 하여 삼방리가 되었고, 임금이 찾아온 산이라 하여 어래산이라는 유래가 생겨났다 한다. 실제로 어래산의 산 중턱에는 배극렴을 닮은 마애불이 존재하고 있다.

배극렴의 본관은 경북 성주이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며, 호는 필암(筆菴)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 후 우왕 2년(1376)에 진주도원수가 되어 마침 왜구가 경상도 남해안을 통해 침략해 오자 이를 대파하였으며, 그 공로로 우왕 4년(1378)에는 경상도원수로 승진하여 욕지도에서 왜구를 또다시 대파하는 공적을 남겼다. 특히 고려 우왕 14년(1388)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인 명과의 영토분쟁으로 요동정벌을 위해 최영 장군과 함께 군사를 출병하였을 때,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을 주도한 인물이다.

배극렴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를 도와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 왕조의 개국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그 공으로 개국 1등 공신이 되었고, 그 뒤 조선 최초의 영의정(문하좌시중)에 특진되고 성산백에 봉해졌다.

배극렴(1325~1392)의 묘소와 신도비는 증평에 있다. 증평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보강천을 건너 인삼휴게소 왼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두타산 아래에 성주 배씨 집성촌인 송산리 송오마을이 나온다. 배극렴의 무덤은 송오 마을 뒤쪽 언덕 양지바른 곳에 남향으로 있고, 앞에는 신도비가 서 있다. 배극렴 묘소와 신도비는 충청북도기념물 제98호 지정돼 있다.

조선의 수많은 공신 가운데 가장 으뜸인 1등 개국공신에다가 제1호 조선 영의정이라는 공신 중의 공신이 바로 배극렴 선생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하게 알고 처신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부패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시대를 여는 데 까지가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자신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천하의 이성계가 3번씩이나 찾아와도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나설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잘 알고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인물인 신진사대부에게 길을 열어준 배극렴 선생과 같은 충복이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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