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을 타고나는 누각, 영동 가학루
학을 타고나는 누각, 영동 가학루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06.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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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충북 영동의 황간(黃磵)이란 지명은 `물이 채워진 골짜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동서남북 방향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황간에서 하나가 된다. 삼도봉에서 발원한 장교천과 동쪽에서 흘러오는 추풍령천, 상주의 석천이 만나 황간에서 초강천이 되어 금강으로 합류한다.

지리적으로 경상도, 전라도와 인접해 충청도 특유의 성격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풍속」조에도 “백성들의 풍습이 순박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검소하고 재물을 아끼니, 영남지방의 기풍이 있다”라고 실려 있다.

황간은 예로부터 추풍령 너머 첫 고을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높은 산 맑은 물 사이 농토가 비교적 넓어 인심이 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경부고속도로와 4번 국도가 황간면 소재지를 지난다. 예나 지금이나 황간은 물자와 사람이 빈번히 오가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가학루(駕鶴樓)는 황간 면 소재지인 남성리, 초강천변 높다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 공양왕 2년(1390) 당시 현감 이은이 왜구 출몰을 대비해 쌓은 황간읍성이 있던 곳이다. 조선전기 왜구 출몰이 감소하면서 그 기능이 서서히 약화되다가 조선 현종 15년(1674) 현(縣)의 치소(治所)가 사군봉(使君峰) 아래로 옮겨지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 관아터에는 현재 황간향교가 들어서 있다.

가학루는 조선 태조 2년(1393)에 황간현감 하첨(河詹)이 처음 세웠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 남재(南在)가 `가학루(駕鶴樓)'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가학(駕鶴)이라는 이름은 `천지의 시초를 초월하고 도의 본체와 어울려 바람을 타고 노니는 신선이 된다'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세웠고 이후 역대 황간 현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의 치소가 있을 당시의 가학루는 평시(平時)에는 자연경관을 즐기고, 전시(戰時)에는 사방을 살피는 전망대요, 지휘소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는 황간초등학교가 불타자 잠시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4칸의 팔작지붕 집인 가학루는 측면의 한쪽은 3칸이고 다른 한쪽은 2칸인 독특한 구조인데, 여러 차례 고쳐 짓는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가학루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는 강건너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 위치에서 누하(下)부분은 대나무 숲으로 가려지고 누상(上)의 난간으로부터 분절되어 기둥의 수직적인 요소와 우람한 지붕으로 완결된다.

가학루에 오르면 지나온 추풍령 쪽으로의 조망이 시원하고, 앞으로 갈 황간 쪽으로의 조망도 좋은 편이다. 추풍령 쪽 너른 들판과 우뚝우뚝한 산은 호연지기를 길러주고, 황간 쪽 면소재지의 오밀조밀한 건물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가학루(駕鶴樓)에는 서거정(徐居正), 이황(李滉), 조위(趙偉), 이안눌(李安訥)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탐방하여 시문과 기(記)를 남겼다. 모두 가학루와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했는데, 이러한 시문(詩文)을 통해서 가학루는 주변의 자연과 역사와 사람들의 일상사에까지 무한한 크기로 확장되고 있다.

가학루는 현(縣)의 치소(治所)에 속해 있을 때에는 자연 감상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으나, 향리를 찾은 사신이나 지체 높은 빈객을 접대하는 장소 혹은 향토 세도가들의 시회나 풍류 모임의 자리로 사용되었고, 국난 시에는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등 다양한 목적을 수행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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